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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산칼럼] 아름다운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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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찬 화백 평생 남을 위한 배려
아등바등 사는 세상에 귀한 멘토
기사를 보자 마자, 놀라움과 기쁨이 뒤엉켜서 전화를 했다. 원로 삽화가 홍성찬 화백이 여든을 넘긴 나이에 그림책 ‘토끼의 재판’을 펴냈다는 놀라움, 그 원화를 모은 전시회가 열린다는 기쁨이었다. 죄송한 마음을 무릅쓰고 고백하자면, 나는 선생이 이미 돌아가시고 안 계신 줄 알았기 때문이다.

갤러리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하며 헤아려 보니 내가 홍 선생을 처음 만났던 때가 스물여덟, 소설 ‘해빙기의 아침’이 모 신문사의 장편소설 모집에 입선하면서 연재가 시작됐을 때였다. 그때 삽화를 맡아 주신 분이 17년 연배인 홍 선생이었다. 

한수산 작가
선생의 삽화는 화가의 개성이 두드러진 독창성보다는 글의 이해와 흥미를 살리는 쪽에 더 가치를 두고 있었다. 자신의 작품에 대한 이러한 자리매김은 삽화의 역할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홍 선생 삽화의 가치는 발군의 묘사력과 화가의 인품이 그대로 묻어나는 서정성 그것을 뒷받침하는 치밀한 고증으로 무장돼 있었다.

그러나 선생이 바치는 노동의 강도에 비해 예우는 너무하다 싶게 헐값이었다. 그나마도 출판사에서 제대로 돈을 지불하지 않는 예가 흔하지 않은가. 어린 내가 봐도 그저 늘 이용만 당하고, 그림 값도 떼이기가 다반사였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홍 선생 쪽이었다. 100을 받기로 하고 그림을 그려 보냈는데 60밖에 안 주더라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쪽 회사도 사정이 어렵다네요’ 하며 허허 웃고 나면 끝이었다. 저렇게 살아도 되는 건가 싶고 한편으로는 이렇게 착하게 살아도 밥을 먹고 살긴 사는구나 싶었다.

내가 오히려 욱하고 성질이 치밀어 ‘선생님, 과부가 홀아비 사정 봐주다가 애 밴대요’ 하는 말이 목구멍을 간질이곤 했다. 구름을 헛디뎌 땅으로 내려온 신선도 아니겠고 사모님이 힘들어서 어떻게 살까 싶던 때가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매사에 그악스럽고, 억울하다 생각되면 이를 갈며 물고 늘어지고, 한 푼이라도 손해를 보면 세상이 뒤집히는 듯 악을 써대는 세상에서 그렇게 선생님은 초연했다. 생활의 불편이나 어려움이 왜 없었으랴. 그러나 선생은 늘 담담했고, 물결이 가만가만 철썩이는 것 같은 평화로움이 생활의 축과 격을 만들고 있었다.

이제와 돌아보며 고맙기만 한 것은 선생의 그 모습이 나에게 가르침으로 남았다는 점이다. 흙탕물을 튀기면서라도 살아남고, 몸 버리면서라도 싸워서 이기며 살지 않고 선생님처럼 평화로울 수만 있다면 저게 얼마나 윗길의 삶인가. 이제 막 세상살이를 시작하는 젊은 후배에게 선생은 그것을 몸으로 가르쳤던 것이다. 실로 오랜만에 뵙는 선생님과 전시장을 돌며 참 훈훈했다. 출판사가 전시장을 마련하며 내건 이름도 ‘보림 홍성찬 갤러리’다. 그것부터가 감동이었다. 늦게라도 이런 명예롭고 따뜻한 보상이 이루어지니 그토록 반가울 수가 없었다.

요즈음 젊은이에게서 느끼는 아쉬움에는 멘토에 대한 그들의 고정관념이 있다. 머리 좋고 그래서 명문 학교를 나와, 초고속으로 성공의 길이나 가는 사람을 사표로 삼는 젊은이를 보고 있자면 그들의 꿈이 그렇게 가난하게 느껴질 수가 없다. 홍 선생은 한국을 대표하는 삽화가의 한 분으로 자신의 작업에는 그토록 올곧게 성실했지만 늘 손해 보는 삶을 마다하지 않았고, 남을 위한 배려를 자기보다 앞자리에 놓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덕목인가.

‘홍성찬 할아버지. 어떻게 하면 이렇게 그림을 잘 그릴 수 있어용?’ 엄마 손에 이끌려 찾아왔을 초등학생이 삐뚤빼뚤한 글씨로 써넣은 전시회 방명록 한구석에 나도 자리를 비집고 들어가 진정어린 한마디를 써 넣었다. “감사드립니다. 선생님과 함께했던 시간은 행복했습니다.”

한수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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