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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기행] 이제, 아빠의 인생 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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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1-06-21 15:31:51 수정 : 2011-06-21 15:3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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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원 때였던가? 이러던 녀석이...
“이제는 저한테 너무 신경 쓰시지 마시고, 아빠도 아빠의 인생 사세요!” 어느 날 아이가 내게 한 말이다. 한국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다가 이곳에 와, 스스로 다른 환경 속으로 들어가기가 무척이나 어려웠다는 것을 아빠는 알고 있다. 독일의 삶이 시작되자마자 사업상 힘들었던 상황이어서 아이에게 관심을 가질 여력이 없었던, 독일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부모를 대신해서 혼자서 판단하며 적응해 가야했던, 한참이 지난 어느 날, 같은 학교에 새로 온 한국아이를 잘 도와주던 아이의 “아빠 난 처음에 물어 볼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라는 한마디에 모든 아픔이 함축되어 있는 듯하다. 그 말을 들어야 했던 아빠의 마음은....

새로운 기준과 가치관을 만들어 가는 사춘기 때는 한국의 정서와 독일의 사고 사이에서 얼마나 갈등이 심했을까? 집에 오면 지나칠 정도로 완고한 아빠의 한국적 사고와 집만 나서면 이 곳 아이들과 이곳 문화와 접하며 생활해야했던 이중적 생활 공간속에서 아이는 많이도 방황했을 것이다. 아이의 의사를 존중해서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책임지게 하는 독일 정서 속에 살면서도 귀 거리를 하고 싶어 귀를 뚫고 싶어 하는 아이에게, “시집가서 신랑한테 허락받고 뚫어라”고 할 정도였으니 집에만 들어오면 아이에겐 이해되지 않는 힘든 딴 세상이었을 것이다.

지나친 아빠에 대한 반항이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것을 느낀다. 그럼에도 아빠와의 신뢰를 지키려고 애쓰는 모습이 기특하다. 아이에 대한 아빠의 기대만큼이나 아이는 힘들었을 것이다. 오죽하면 담임선생님이 나름대로는 잘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면 칭찬보다는 질책을 많이 하는 나를 불러 “아이가 최고가 아니면 만족을 못합니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니 “한국 간다.”는 소리 하지 말아 주세요.” 라고 충고 하였을까?

그런데도 잘 자라 주었다. 아이에게 그리고 엄마에게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이 곳에 오고 몇 년이 안 되었던 8학년 때는 낙선의 두려움에 말렸던 부모를 뒤로하고 한국 사람으로서 한 번은 해봐야 한다며 선배 독일학생후보를 제치고 전교학생회장에 당선되었던 일, 그 때부터 독일과 독일인에 대한 자신감을 얻은 아이는 동네꼬마들과 함께하는 봉사며, 학교에서는 방가 후 저학년의 숙제도 공부도 돌봐주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그러다보니 학생들의 과외를 부탁하는 선생님과 학부형들, 연극이니 춤이니 동아리 활동을 하며 여러 번 지역 신문에도 오르내렸으니, 어느 듯 이곳 사람이 되어 길가다 만나는 이웃들과 얘기 나누는 아이를 멀찌감치 쳐다보는 엄마 아빠가 되었다.

독일에 와서 힘들었던 과정들을 되돌아보며 그나마 아이가 잘 적응해 준 것에 대해 감사를 한다. 때로는 모질게 내 뱉었던 아빠의 말에 많은 상처도 되었겠지만 그것이 도리어 좋은 자극이 되어 질 뿐, 상처로 남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아빠의 마음이다. 이곳의 부모들은 아주 작은 것에도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더 많은 꺼리의 칭찬보다는 작은 꾸지람의 확대된 잔소리가 모든 칭찬을 묻어 버렸다. 한국이 아닌 독일에서 살아가는 우리 아이에게는 아빠의 그 강도가 더 크게 느껴졌을 것이다.
더듬거리며 암송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만 18세가 되어 성인이 되던 날! 남들처럼 친구들을 초대하는 찬치 상을 차려주지 못한 것이 가슴 한 컷에 남아 있다. 도리어 나는 아이에게 “너도 이제 성인이니까 우리 가정의 삼분의 일을 책임져야 한다.”라고 선언하였다. 그것은 경제적인 것부터 모든 것을 포함해서 책임이 따라야 성인으로서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괴변을 늘어놓으면서....

그런데 어느 날, “이제는 저한테 너무 신경 쓰시지 마시고, 아빠도 아빠의 인생 사세요!” “아빠는 언제까지 저를 도아 주실 거예요?”라는 말을 들은 나는 순간 충격이었다. 독립을 선언하는 것인지? 진정 아빠를 생각해서 그러는 것인지? “너 때문에.....”라는 엄마 아빠를 무척이나 부담스러워하는 것을 느끼곤 하였는데, 한국에서 한국의 친구들과 어울려 살았다면 자식을 뒷바라지 하는 것쯤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독일이다. 독일의 아이들은 만 18세 이후에는 대체적으로 독립을 선언한다. 일자리가 부족한 요즘이야 부모 곁에 있으면 먹고는 살 수 있으니 떠나지 않는 경우도 많다고는 하지만, 부모를 의지하기보다는 스스로 인생을 헤쳐 나간다. 그것을 보며 아이는 한국 부모의 자식사랑을 측은하게 여겨 아빠의 희생으로 느꼈을지 모른다. 그것이 도리어 한국 부모들의 보람일진데,

나는 대학 수험생이 된 아이에게 이렇게 제안 하였다. “스스로 벌어서 공부하면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만, 아빠의 도움을 받으면 일찍 공부를 마칠 수 있다. 오래 동안 공부를 하든지 일찍 끝마치고 아빠의 도움을 갚든지?” 그리고 이런 말도 남겼다. “만약에 여의치 않으면 안 갚아도 되는데...”

이제는 한국 방문객에게 통역까지(Freilichtmuseum/야외민속박물관)
한국에서 유치원을 갔다가 돌아오며 “아빠” 하고 목청껏 부르던 맑고 목소리! 아빠에 대한 아이의 진정한 그 마음이 아직도 내 마음 속엔 고이 간직되어 있다. 그러던 놈이 이제는 아빠의 삶을 걱정하다니.....

분명 어른들의 욕망과 한을 대신 풀어 주기 위해 자식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알게 모르게 나는 그것을 지금까지도 강요하고 있다. 엄마 아빠가 세상을 떠난 후 어차피 혼자 살아야 한다면 그냥 독일식으로 키울까도 고민해 보지만 그리 쉽게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혼자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함께 잘 살기 위해서, 베풀고 싶을 때 마음껏 베풀며 더불어 살기 위해서 오늘 최선을 다해야 한다.’며 지금도 다그친다.

부족한 아빠이긴 하지만 하나님의 비전을 향하여 마음껏 자신의 꿈을 이루어 가는 아이가 되어, 함에도 불구하고 어려움을 축복으로 만들어 가길 바라며 기도할 뿐이다.

민형석(독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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