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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덕희의 사진에세이] ⑤ 불어라 봄바람, 그 길을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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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2-03-22 17:12:31 수정 : 2013-06-28 15: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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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은 어느새 시치미 뚝 떼고 이젠 봄이다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야트막한 산에서
터지는 봄소리가 들린다
젊은 날 나는 사막으로 난 길을 달리고 있었다.

붉은 모래 사막의 지평선을 보며 끝이 어딘지 모르는 뜨거운 그 길을 가고 있었다. 1970년대 후반 중동의 건설 현장으로 떠나신 아버지를 만나러 사막을 건너고 있었다. 내리쬐는 불덩이 같은 폭염이 달리는 차를 달구고 있었지만 하루 종일 달리는 사막의 모래바람 길은 들뜨고 있었다. 나도 아버지와 같은 길을 밟아 당신이 있는 그 사막으로 갔다.

아버지는 평생 목수였다. 당신의 귀에는 항상 몽당 연필이 꽂혀 있었다. 어린 시절 길을 걷다 다리가 아프다면 당신 등에 업고 파래 붙은 센베이 과자(전병) 한 봉지 얹어 주시며 그 먼 길을 걸으셨다. 아버지의 넓은 등 위에서 어깨너머로 과자를 드리며 업혀 갔던 그 길은 지금 개나리 한창이련만.

검게 그을린 아버지의 모습을 보니 그동안 그리워했던 마음은 어디 가고 낯설게 머뭇거리며 안부만 여쭙고 말았다. 그곳에 계신지 여러 해, 그리웠던 아버지였건만 짧은 만남 속에 건강하시라는 말만 하고 발길을 돌렸다. 차를 몰고 돌아 오는 사막의 길 위에서 뜨거운 눈물만 하염없이 흘렸다. 거센 모래 폭풍이 앞을 가려 어둑해지는 길은 사방에 모래만 보였다. 지평선 너머로 붉은 해가 넘어 가는 사막은 더욱 붉게 내 앞으로 일어서며 다가 왔다. 돌아오는 내내 붉은 사막 사이로 길게 흐르던 검은 아스팔트 길은 내 젊은 날의 제일 길었던 길이었다. 아버지는 그렇게 몇 해를 더, 가족을 그리며 당신의 젊은 날을 사막의 모래바람 속에서 보내셨다. 그 후로 나는 서울을 떠나 동해의 바닷가에서 내 삶의 길을 걷고 있었다. 먼 타국에서의 짧은 만남이 못내 아쉬워 나도 아버지가 되어 버린 지금 당신과 먼 길을 함께 떠나고 싶었지만 당신이 안 계신 지금 사막을 건너 당신과 그 시간 속으로 다시 가고 싶다.

내 마음 저 길 끝에 놓았으나 누가 알까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란 걸.
부용화 마른 꽃대 바람에 휘날리던 아침/아버지는 세상을 잡았던 그 손을 놓고/휘적휘적 계절 속으로 먼 길을 떠나셨습니다/남은 사람들에게 당신의 부재가 되는 지금 당신은 어느만큼 가셨을까?/

바지랑대 끝에서 삶의 힘으로 견뎌 온 당신의 길지도 않았던 인생/당신에게서 전화를 기다리다 가슴속으로 그리움을 묻어둡니다/자상한 웃음과 배려, 그리고 자식 사랑. 이제는 아무도 보지 못합니다/살아 다정스럽던 눈빛과 너그러운 뒷모습/

병상에서 아직은 할 일이 많다던, 더 있어야 한다던 당신은 졌습니다/아니 져 주었습니다/더 각박한 삶들에게 투욱 던져 주고/아버지, 당신은 짐을 꾸렸습니다/먼 길을 떠나는 짐을

나는 아버지를 잃었지만 사랑을 얻었습니다/한 생애 멋지게 살다가 조용히 길을 떠난 당신의 사랑을 비로소 얻었습니다/지금은 어디쯤 홀로 가고 계실까/가시는 당신의 길은 외롭지나 않으신지요/이 봄 당신과 같이 꽃구경 가 보고 싶습니다/

길에서 정말 아름다운 풍경을 만나면 저 길에서 길을 잃고 싶다.
시간을 밟아가는 것은 사람이지만 시간의 자국을 새기는 것은 지나간 추억이다. 길 위의 자국은 우리가 살아온 삶의 흔적이고 길 위의 상처는 존재의 상처와 같다. 길을 걷는다는 것은 누군가의 생각과 흔적을 밟는 것이다. 그리고 그 위에 나의 추억을 얹는 것이다. 길은 걸어 주지 않으면 땅에 불과하고 바람 같은 길은 외롭게 고독하게 끝까지 걸어준 삶의 흔적이다. 사람도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듯 길도 길로서 존재하려면 가끔은 텅 비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 비어 있음은 얼마나 사람의 가슴을 가득 채우는가.

갈 곳 없는 사람보다 갈 곳 있는 사람이 행복하고 누군가를 기다리며 마중하고 배웅 받는 길은 행복하지만 우리 인생에는 가고 싶지 않는 길과 다시 돌아보고 싶지 않는 길이 있다. 그럼에도 그 길을 가야 한다면 아픔이지만 인생은 무수한 길을 가야 하고 선택해야 한다. 내비게이션이 모든 길의 안내자가 되어버린 요즘. 이젠 내비 없으면 모르는 길은 가기 어렵다. 우리 인생도 내비처럼 불안을 최소화하는 삶의 나침반이 있었으면 좋겠다. 인생은 길과 길 사이로 흐른다.

이 봄날 먼 길을 떠나는 다양한 삶들이 출구가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다. 시골 간이역을 지키고 있는 낡은 나무벤치는 먼 옛날 저기에 걸터앉아 기차를 기다리며 단어를 외웠을 통학생들과 곡식을 들고 나왔을 노인들 그리고 가난했던 우리네 어머니들 모습이 떠오른다. 그들에게 이 기차는 또 하나의 길이었으며 꿈이요 희망이었을 것이다. 주머니 속에 손을 넣고 자그만 열차표를 만지작거리면 손아귀에 꼬옥 잡혀오는 추억들, 오랜만에 나들이는 가슴을 설레게 하고 봄볕의 맑고 시린 하늘은 시골 간이역 지붕을 따뜻하게 비추고 있다. 기다리는 6량짜리 통일호 기차가 들어온다는 역내 방송이 들리자 사람들은 하나둘 저마다 삶의 짐들을 꾸려 개찰구를 나간다. 텅 빈 기차 안이 모두 특실이다.

서서히 기차는 움직이고 편안한 속도로 덜컹덜컹 흔들리며 터널을 지나 들판을 가로지르며 마주 앉은 사람과 나란히 앉은 사람을 함께 데리고 간다. 기차는 다시 내리고 오르는 이 없는 조그만 간이역에 정차했다가 먼 데서 급히 오는 기차를 보내고 나서야 다시 출발한다. 덜컹덜컹 이 너그러운 시간을 선반 위의 짐들도 사람들과 함께 흔들리며 간다. 차창 밖으로 나지막한 산과 봄이 오는 너른 들판 그리고 강과 하늘 사이에 부표처럼 박힌 집들이 보이고 사람살이가 보인다. 스쳐가는 풍경들, 길에서 보이는 얼굴들, 하나하나가 정겹고 살갑게 다가온다. 그 풍경들이, 그 사람들이 기실 내게 너무 익숙한 풍경들이요, 낯설지 않은 얼굴들이기에 그렇다. 푸른 듯 흰 안개가 낀 산, 그 아래 멀리 마을과 넓은 들길을 보며 가슴을 억누른다.

즈려 밟는 이 꽃길은 내일을 동행할 수 있는 사랑에 대한 꿈이다.
안개 속을, 바람 속을 달리던 기차가 종착역을 알리는 방송에 사람들은 삶의 짐을 다시 챙긴다. 흔들리며 느리게 달려온 기차에서 또 다른 시작을 준비한다. 우리네 삶도 가끔은 느리게 한편에서 낯선 이웃과 가까이 어깨를 부딪고 앉아 통일호 열차처럼 가고 싶다.

간이역마다 쉬엄쉬엄 그리고 덜컹덜컹덜컹….

이렇게 길을 떠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 벅차지만 정처 없이 떠난다는 것은 언제나 들풀 같은 내 마음을 흔든다. 마음 따라 길 따라 봄 풍경도 흔들리고 들판과 골이 휘날린다. 흐르는 시간, 스쳐 가는 봄바람이 가슴 깊이 다가온다. 그늘 한 점 없는 봄의 시골 길을 타박타박 걸으면 발 밑에 그림자는 매달려 따라오고 주위는 적막하다. 햇볕이 정수리에 내리쪼이는 길은 마치 길게 빼물어진 바짝 마른 혀 같지만 흙 길 주변엔 벌써 푸르름이 올라오고 있다. 계절은, 자연은 세상의 중심이건, 세상의 귀퉁이건 차별하여 오지 않는다. 봄으로 가는 길목에 화사하게 피어난 꽃들을 보면 문득 왜 그 옛날이, 그때가 그립다고 느껴지는지…. 들리는 소리라곤 새소리, 바람소리, 물소리뿐인 여기는 그냥 산골이기 때문에 조용하고, 산골이기 때문에 노인들뿐이고, 하여간 바람소리 물소리뿐인 건 산골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 아니냐고 생각하면서 이 아름다운 풍경들에 점점 무뎌져 간다. 시골 살이, 노동과 땀과 눈물이 들어간 터전의 의미란 마음에 안 들면 쉽게 손 털고 나갈 수 있는 곳이 아니기에 더욱 사랑한다. 이 산골, 이 산골짜기에는 누가 보지 않아도 찔레꽃 피고 연분홍 산복숭아꽃 핀다. 산 너머 냇가에 물길도 소리를 내고 물오른 버들 제 모습 비추는 냇가는 더없이 깊어진다.

계절은 어느새 시치미 뚝 떼고 이젠 봄이다.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야트막한 산에서 터지는 봄소리가 들린다. 저 산은 무수히 피었다 지는 꽃들을 어떻게 보낼까. 바람을, 비를, 햇살을 받으며 새와 벌레와 정을 쌓을 터, 아쉬움이라고 없을까. 수없이 많은 이별의 장소치고는 너무 아름답다. 꽃 진 자리 꽃이 피고 바람 지나간 자리 바람 길을 열어 놓는다. 봄이라고 또 한 움큼 꽃들이 핀다.

봄 꽃을 보니/그리운 사람 더욱 그립습니다

이 봄엔 나도/내 마음 무거운 빗장을 풀고

봄 꽃처럼 그리운 가슴 맑게 씻어서/사랑하는 사람 앞에 서고 싶습니다/조금은 수줍은 듯 어색한 미소도보여 주고 싶습니다

그렇게 평생을/피었다 지고 싶습니다

〈봄 꽃을 보니- 김시천〉

창호지 문살 속에 달이 떠 있고 나뭇가지가 문풍지 바람에 떤다. 문을 반쯤 열어 놓고 지붕 위에 손 닿을 듯 떠 있는 둥근 달을 보며 봄 밤에 취해본다. 밤이슬이 낡은 기와지붕을 적시는 새벽. 처마 끝에 맺힌 이슬방울 떨어지는 소리만 또록또록…. 불어 오는 바람에서는 향긋한 풀 냄새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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