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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딸서 한국호 리더로… 위기에 강한 '철의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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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2-12-20 16:43:38 수정 : 2012-12-20 16:4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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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당선인이 걸어온 길 “저에게는 돌봐야 할 가족도, 재산을 물려줄 자식도 없습니다. 오로지 국민 여러분이 저의 가족이고, 국민행복만이 제가 정치를 하는 이유입니다.”

새누리당 박근혜 당선인은 투표 전날인 18일 기자회견에서 이 말을 다시 했다. 마지막 정치 도전을 앞두고 자신의 불행한 가족사를 내보이며 밝힌 비장한 각오다. 1998년 정치를 시작한 지 15년 만에 그는 다시 국민의 선택을 받았다.

박 당선인은 1979년 동생들과 함께 청와대를 떠난뒤 34년만에 귀환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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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새누리당 박근혜 당선인이 대선 유세 당시 이동 중인 기차 안에서 메모를 하고 있다.
남제현 기자
◆박근혜 인생 5막

대통령은 박근혜 당선인 인생에서 5막에 해당된다. 박 당선인은 대선용 공식홈페이지 ‘나의 삶’ 코너에서 자신의 인생을 5단계로 나눴다. 그 마지막이 이번 대선 출마다.

시작은 스물두 살 나이로 시작한 퍼스트레이디 대리였다. 박 당선인은 “전자공학도로서 평범한 일상을 꿈꾸던 제가 어머니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대한민국 퍼스트레이디가 됐다. 비록 제 꿈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했지만, 그때부터 저는 국가와 국민을 먼저 생각하게 되었다”고 그때를 회상했다.

청와대 생활이 애국심과 국민을 위하는 마음가짐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됐다는 얘기다. 그래서 박 당선인은 평소 ‘안거낙업(安居樂業)’을 정치관으로 자주 언급한다. 안거낙업은 국민이 근심, 걱정 없이 살면서 생업에 즐겁게 종사하는 것을 뜻한다.

대선 기간 내내 박 당선인이 ‘국민행복시대’를 내세웠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는 “국민 개개인의 꿈을 향한 노력이 국가를 발전시키고 국가 발전이 국민행복으로 선순환되는 국민행복의 길이 새로운 국가 발전의 길”이라며 3대 핵심과제로 경제민주화 실현, 일자리 창출, 한국형 복지 시스템 확립을 제시했다.

2막은 정치입문. 1998년 IMF 사태로 경제가 나락으로 떨어졌을 때 박 당선자는 ‘이대로 무너질 수 없다’는 절박한 심정과 ‘국민의 어려운 삶을 해결해야겠다’는 신념으로 대구 달성군에 출마했다고 한다. 박 전 대통령 사망 뒤 청와대를 나와 은둔생활을 했던 박근혜가 ‘정치인 박근혜’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3막은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역풍과 부정부패로 한나라당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을 때 당 대표로 구원등판한 때다. 박 당선인은 이 즈음 실시된 17대 총선에서 10석도 건지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121석을 얻었다. 이때 ‘선거의 여왕’이란 또 하나의 이름을 얻으며 여권의 부동의 중심인물로 떠올랐다.

박 당선인은 자신이 4막이라고 표현한 비상대책위원장으로 구원등판해 19대 총선에서 과반 의석을 확보했다. 당명을 버리고 당헌·당규를 갈아치우는 뼈를 깎는 쇄신과 인적청산이 동반됐다. 당 내외의 거센 반발에도 박 당선인은 ‘당이 변하고 정치가 변해야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있다’는 신념으로 쇄신책을 밀어붙였다.

◆드라마틱한 인생사

박 당선인의 삶은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는 자서전 제목 그대로 비극과 굴곡의 드라마 그 자체였다.

가장 최근의 비극은 정계에 입문하던 15년 전부터 자신을 보좌한 이춘상 보좌관과 김우동 새누리당 홍보팀장이 강원도 유세 도중 교통사고로 숨진 것이다. 공개석상에서 눈물을 잘 보이지 않는 그는 이 보좌관의 발인식에서 여러 차례 눈물을 쏟았다.

교육자의 꿈을 갖고 프랑스 유학을 떠난 박 당선인은 1974년 모친인 육영수 여사를 흉탄에 잃고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대신해야 했다.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명에 잃은 뒤에는 20년 동안 은둔생활을 했다. IMF사태를 기회로 스타 정치인으로 거듭났지만 2006년 지방선거 신촌 유세에서 ‘커터 칼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그의 얼굴에는 지금도 지울 수 없는 굵은 흉터가 남아 있다.

대권 쟁취도 사실상 세 번째만의 성공이다. 2002년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와 당 개혁을 놓고 갈등을 겪다 탈당한 뒤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해 대선 출마를 타진했지만, 보수 후보 단일화 요구에 밀려 복당했다. 2007년 17대 대선에 출마했지만, 당내 경선에서 사상 유례없는 혈투 끝에 이명박 후보에게 석패해 꿈을 접어야 했다.

일반 당원·대의원·국민선거인단 경선에서 모두 승리했지만, 국민여론조사에서 뒤져 분루를 삼켰다. 박 당선인은 깨끗이 승복하고 이 후보를 지원했다.

2008년 이명박 정권 출범 후 정치역정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18대 총선에서는 당을 장악한 친이(친이명박)계에 의한 친박(친박근혜)계 ‘학살 공천’이 있었다. 박 당선인은 당시 국회 정론관에서 마이크를 잡고 “국민도 속고, 나도 속았다”고 분통을 터뜨릴 정도였다. 이후 박 당선인은 상당 시간 ‘칩거’했고, 세종시 이전, 미디어 법 처리 등 민감한 현안을 놓고 정권과 끊임없는 갈등을 겪었다. 정치적 시련기였지만 국민들에게는 ‘원칙과 신뢰의 박근혜’라는 인상을 각인시킨 시절이었다.

◆34년만의 청와대 귀환

평범하지 않은 가정에서 태어나 비범한 인생을 살아온 박 당선인은 평생을 자신을 버리고, 절제하고 채찍질하며 살아왔다. 거친 정치판에서 숱한 라이벌들과 겨루며 집권 여당의 대선 후보로 우뚝 설 수 있었던 배경이다.

박 당선인은 검소한 삶을 살아온 것으로도 유명하다. 주변에서 지켜본 인사들은 그가 식탁에 떨어진 밥알 하나까지 주워 먹으며 식사한다고 전한다. 정치입문 당시 신었던 신발을 지금도 수선해 신고 다닐 정도다.

학창시절에도 그는 어머니의 옷을 줄여 입을 정도로 검소했다. 박 당선인과 성심여중·고 동기동창생인 박봉선씨는 2일 첫 대선후보 TV토론 찬조연설에서 “대통령 딸 도시락이니 근사할 거라 생각했는데 보리쌀 섞인 잡곡밥이라 솔직히 실망했었다”며 “가난을 이겨내려고 국민에게 보리 혼식을 권장했던 당시 보리쌀이 반쯤 섞인 밥에 계란말이와 멸치볶음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며 ‘대통령 딸도 나하고 똑같구나’ 생각하니 마음이 참 편했다”고 전했다. 서강대학교 전자공학과 재학 때도 박 당선인은 늘 신촌에서 버스를 내려 언덕 위 학교까지 걸어다닌 일화로 유명하다.

양친을 모두 흉탄에 잃은 그는 사람과의 관계에 신중하고, 한 번 인연을 맺으면 ‘의리’를 매우 중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서전에 아버지의 죽음 뒤 상황에 대해 “당시 아버지의 가장 가까이 있던 사람들조차 싸늘하게 변해가는 현실은 나에게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고 배신의 아픔을 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박 당선인의 성격은 자신의 보좌진 등 일부 측근들과만 소통한다는 ‘불통’ 논란과 ‘인(人)의 장막에 휩싸여 민심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비판을 동반한다. 박 당선인 스스로 “(여러 사람과 매일) 팔이 아프게 전화통화한다”고 해명해도 불통 논란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는다.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도 박 당선인에겐 빛과 그림자 처럼 양면적인 존재다.

과거사 문제는 이번 대선에서 박 당선인이 고전한 가장 큰 원인이었고, 앞으로도 그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 박 당선인은 올해 아버지 38주기 추도식에서 “이제 아버지를 놓아드렸으면 한다”며 “아버지 시대에 이룩한 성취를 국민께 돌려드리고, 그 시대의 아픔과 상처는 제가 안고 가겠다”고 다짐했다.

박 당선인이 주인이 된 향후 5년의 청와대가 과거와 현재의 싸움장이 될지, 미래로 가는 도약대가 될지는 온전히 그의 선택 여하에 달렸다. 첫 여성 대통령, 첫 부녀 대통령 기록을 세운 그가 5년 뒤 청와대를 나설 때 어떤 평가를 받을지에 대한 박 당선인의 고민이 시작됐다.

나기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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