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화가 김현정의 그림토크] 기운생동

‘기운생동’(종이에 채색).
우울증 진단을 받아본 적은 없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모두가 그렇듯 혼자 끙끙대며 앓던 순간이 많았다. 그때마다 나는 운동으로 땀을 내며 깊은 슬픔의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왔다. 항상 지금처럼 건강했던 것은 아니다. 전에는 이유 없이 온종일 방바닥에 누워 있거나 누가 말만 걸어도 화가 나고 눈물이 났던 때가 있었다. 밤만 되면 정신이 맑아지고 나 혼자 세상에 깨어 있다는 느낌을 즐길 때도 많았다. 나는 봉사활동과 여행을 통해 나 자신을 추스를 수 있었고, 그 힘은 운동을 통해 얻었다.

일 때문에 한동안 어쩔 수 없이 낮이 밤이 되고 밤이 낮이 되기도 했다. 이렇듯 생체주기가 꼬이면 너나없이 식욕이 들쑥날쑥해지고 쉽게 피로를 호소한다. 두려움과 상실감은 자칫 컴퓨터 게임의 가상세계에 빠지게 한다. 스스로 현실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때 나는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나에 대해 진지하게 심리 상담을 받아보고 싶었다. 그러나 남에게 내 마음을 털어놓는다는 것이 무척 힘들었기에 선택한 게 상담 공부다.

아무리 주변에 좋은 사람과 좋은 책이 있어도 내가 마음을 닫고 감정을 억누른다면 모든 게 쓸모없다. 마치 물을 체로 받는 것과 같다. 우울증은 그 사람이 약해서 걸리는 병이 아니다. 전문가들은 오히려 지능이 높고 현실감각이 뛰어난 사람들이 쉽게 걸린다고 말한다. 우울증은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어쩌면 그 시작은 가정이나 사회에서 출발했다. 예민한 사람들이 그 예민함을 이해받지 못해 생긴 병인 것이다.

오랜 상담기간을 통해 나는 문 뒤에서 숨죽여 울고 있던 나의 내면아이를 끌어안았다. 정작 내면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설교나 가르침보다 따뜻한 손길과 웃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운이 좋게도 그림을 통해 내 안에 아이가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운동을 시작할 때도 계획보다는 하고 싶다는 의욕이 사라지지 않도록 쉽게 손에 잡히는 것부터 했다. 시작은 어렵고 어색하게 느껴졌지만 꾸준히 반복하는 가운데 세상을 보는 나의 시선이 변했다. 세상이 다르게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마치 살아 있는 듯 리얼하게 그려진 그림을 가리켜 ‘기운생동(氣韻生動)’하다고 말한다. 일찍이 6세기에 활동했던 중국의 사혁(謝赫)은 그림을 그리는 데 필요한 6가지인 ‘육법(六法)’ 중 으뜸으로 꼽았다. 사람이나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그림으로 재구성하려면 반드시 등장인물의 정신이 살아 있게 그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천재화가 장승업(1843∼1897)은 스스로 그림을 그릴 때마다 “기운생동한다”고 자랑하였다. 그의 그림은 정말 모든 게 다 살아 있다. 잘 그리고 못 그리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도 살아 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 이 사실을 잊지 않으려 운동을 통해 힘을 얻은 내면아이 랄라를 그려보았다. 어때, 랄라의 기운이 쌩쌩하지.

김현정 화가 www.kimhyunjungtal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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