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수정의 공연 돋보기] 인생의 황혼녘서 전하는 삶의 성찰 '감동'

“새색시가 김장 삽십 번만 담그면 할머니가 되는 인생.”

피천득의 수필 ‘송년’에 나오는 문구이다. 삼십 년이 빠르게 흘러가듯, 지나고 나서 돌아본 세월은 눈앞에 생생하기만 하다. 인생의 황혼녘, 엊그제 일 같은 추억을 벗 삼아 살아가는 노년의 모습은 짙은 애상을 전해온다. 

연극 ‘3월의 눈’에는 기억 속 아내와 대화를 나누며 홀로 살아가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그려진다.
연극 ‘3월의 눈’은 봄눈처럼 스러져가는 노년의 삶을 애틋하게 그리고 있다. 막이 오르면 백발 할아버지가 한옥집에 덩그러니 남겨져 살고 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끊임없이 누군가와 대화를 나눈다. 알고 보니 기억 속 아내와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대화를 잘 들어보면 할머니와 겪은 젊은 시절의 연애담에서 6·25전쟁까지 개인사와 근대사가 뒤얽혀 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조만간 집을 비워 줘야 하는 처지다. 손자의 빚을 갚아주기 위해 집을 팔았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의 세월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한옥은 ‘앤티크 가구’의 재료가 될 지경에 이르렀다. 게다가 사람들은 아직 할아버지가 살고 있는데도 마룻바닥을 뜯어가기 시작한다.

할아버지는 결국 아내가 뜨다 말고 세상을 떠나 팔 한쪽이 없는 스웨터를 입고 요양원으로 향한다. 그 뒷모습은 허깨비처럼 가볍고 쓸쓸해 보인다. 할아버지가 그렇게 떠난 이후 3월의 눈이 내리는 가운데 한옥집과 함께 할아버지의 지난 세월이 마구잡이로 헐린다.

이 연극은 담담한 어조 속에서 노배우의 밀도 높은 연기가 커다란 여운을 남긴 작품이다. 지난해 국립극단의 최고령 배우인 백성희·장민호 주연으로 적잖은 호응을 얻은 바 있다. 그런데 지난해 말 장민호 배우가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났다. 현재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앙코르 공연 중이다.

세실극장에서 공연 중인 마스크연극 ‘소라별 이야기’에서도 회상에 잠긴 할아버지의 모습이 비친다. 할아버지는 홀로 보온병에 뜨끈한 차를 타서 공원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일상이다. 그러다가 어린 시절 첫사랑의 추억에 잠기기도 한다. 라디오를 가진 친구가 흔치 않았던 그 시절의 시골 마을. 집안 사정으로 잠시 서울에서 내려온 소라라는 예쁜 여학생과 나눈 풋사랑은 아직도 할아버지 가슴속에 생생한 영상으로 돌아가고 있다.

반면, 힘차게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노인들의 모습도 볼 수 있다. 뮤지컬 ‘식구를 찾아서’의 두 할머니는 노년기에 만난 ‘베스트 프렌드’이다. 가족을 잃어버리거나 가족에게 버려진 채 홀로 살던 할머니들은 서로 의지가 되어 주며 반려동물과 함께 새로운 ‘식구’를 형성한다.

그런가 하면 뮤지컬 ‘아이 러브 유’에서는 장례식장에서 만난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조심스럽게 사랑을 느끼는 모습을 애틋하면서도 재미있게 그려낸다. 장면 제목은 ‘장례식장=부킹장’이다. 더 나아가 연극 ‘19 그리고 80’에서는 할머니와 청년의 순수하면서도 성숙한 사랑이 그려지기도 한다. 극 말미에 할머니가 청년에게 남기고 떠나는 것은 단지 이성 간의 사랑이 아닌 삶의 감수성과 인간애이다.

무대에서 노인은 젊은이에게 인생의 길을 알려주는 스승이나 보호자로 등장하곤 한다. 그러나 노년기의 삶 자체를 조명하는 작품도 적지 않다. 먼저 떠나가는 어른을 바라보게 하는 자연의 순리는 참 잔혹하다. 울고 떼를 쓴다고 바꿀 수 있는 일도 아니다. 무대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노인을 단지 젊은 주인공의 조연이 아닌, 주연으로서 진정성 있게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고 노인의 호흡과 눈빛에서 삶의 지층을 느끼고 성찰하며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현수정 공연평론가·중앙대 연극학과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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