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강주미의 살람, 중동] 〈46〉 ‘세네갈 속 작은 나라’ 감비아

관련이슈 강주미의 살람, 중동

입력 : 2013-12-12 22:01:52 수정 : 2013-12-13 10:56:52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감비아는 세네갈이 국경을 둘러싸고 있으며, 서쪽으로만 바다가 열려 있는 작은 나라다. 감비아의 역사는 세네갈 등 서아프리카의 주변국 상황과 비슷하게 전개된다. 프랑스와 영국이 싸우며 어느 나라가 마지막에 통치했느냐에 따라 언어가 다를 뿐이다. 강대국의 통치 후 독립을 하고, 또 독재가 이뤄지는 역사는 다른 나라와 비슷하다.

감비아는 영국이 통치했고, 세네갈은 프랑스가 통치했다. 그래서 감비아는 세네갈과 다르게 영어를 사용한다. 영어권 나라라고는 하지만 영어가 주언어는 아니다. 원주민어가 있기 때문에 영어와 섞어서 사용을 하거나,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원주민어만 사용하기도 한다. 유창한 영어가 들려오기도 하지만 원주민어와 섞여서 알아듣기 힘들 때도 있다. 세네갈에서도 불어이긴 한데, 딱딱한 발음과 원주민어가 섞인 말들이 들려왔던 것과 비슷하다.

감비아는 서아프리카에서 드물게 영어가 통용되는 나라다. 서아프리카 대부분의 국가는 프랑스가 지배를 했기 때문에 불어를 많이 사용한다. 현지인들은 원주민어가 통하기 때문에 굳이 영어와 불어 때문에 말이 안 통하지는 않는다. 감비아에 오니, 그래도 친숙한 말들이 들려오는 것이 기뻤다.

세네갈에서 아침 일찍 출발해서 국경에 도착하니, 국경문조차 없는 국경을 지날 수 있었다. 허름한 사무소 하나를 거치는 것으로 간단하게 통과할 수 있었다. ‘한국’이라는 말에 그들이 호의적인 태도를 보여 적잖게 놀랐다. 한국을 알고 있다는 것 자체가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내가 감비아라는 나라를 잘 알지도 못하는 것에 대한 미안함이기도 했다. 국경 비자가 쉽게 나오고, 환전하는 것도 쉽게 이뤄졌다.

그렇게 감비아 국경을 넘어설 때였다. 국경 경비를 서는 한 친구가 간절하게 나에게 부탁을 해왔다. 한국을 가고 싶다는 말을 애절한 표정으로 나에게 건넸다. 어찌할 도리가 없는 나는 이메일주소 하나를 적어주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그가 이메일을 보낼 수 있는 컴퓨터가 있는지도 걱정이 됐고, 행여나 이메일을 보낸다고 해도 내가 도와줄 수 없다는 것도 걱정이 됐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는 이메일 주소라도 건네줄 수밖에 없었다. 그의 표정이 그렇게 만들었다. 웬만하면 쓸데없는 희망을 주고 싶진 않았는데, 괜한 행동을 한 게 아닌가 못내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역시 감비아를 떠나온 후에 그에게서 이메일은 오지 않았다.

내가 만끽하고 있는 이 자유가 얼마나 고마운 것인가를 새삼 느끼게 해준다. 어느 나라든 자유롭게 여행 다니고, 내 발길 닿는 곳이면 어디든 훌쩍 떠나버릴 수 있는 이 자유가 너무도 고마운 일이었다. 왜 이들은 이 나라를 떠나는 것이 이리도 어려운가. 무엇이 이 많은 나라들의 경계를 만들어 놓고 분리시켜 버린 것일까. 나는 무거워진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반줄로 향하는 배 위에 짐이 잔뜩 실려 있다.
가까이에 있는 항구를 통해서 배를 타고 가면 감비아의 수도인 ‘반줄’에 도착한다. 이곳의 작은 물줄기들은 대서양으로 흘러 들어간다. 육안으로 도착지가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지만 배를 타고 가야 한다. 하지만 이 배는 한 시간 정도나 간다. 이 가까운 거리를 가는 데 한 시간이나 걸릴 정도로 이 배는 느려도 너무 느리게 간다.

세네갈과 비교를 하면 안 되지만, 가까운 나라여서 그런지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들이 들곤 한다. 세네갈 사람들보다 훨씬 순박하고 착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세네갈은 외국 자본이 많이 들어와서 빈부격차도 심해지고 경쟁도 심해진다. 하지만 감비아는 아직도 많은 원주민들이 자신들의 원래 모습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물론 영국인들이 지어 놓은 소박한 리조트가 있기는 하지만 빈부격차가 심한 사회는 아니다.

나도 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보는 첫발을 내디뎠다. 숙소를 구하는 일부터 만만치 않다. 이런 곳에는 좋은 숙소만이 있을 뿐이다. 감비아인이 호텔을 이용하진 않을 테니 말이다. 몇 군데를 들러서 그나마 저렴한 곳을 찾아내 짐을 풀었다. 중요한 것은 내가 국경에서 받아 온 비자가 일주일짜리라는 것이다. 일주일 안에 이곳을 나가야 하는데 더 급한 일이 있었다. 그 사이에 세네갈 비자를 받아야만 했다. 나의 세네갈 비자는 단수비자여서 한번 나가면 다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세네갈에서 받아오려고 했지만 그것 또한 여의치 않아 무작정 감비아로 들어왔다.

그래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세네갈 대사관을 찾아가는 일이었다. 세네갈 대사관에서는 단번에 거절을 하고는 이틀 후에나 오라고 했다. 감비아에서 세네갈 비자를 받기가 쉽지 않은가 보다.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도 비자발급을 거절당한 것 같았다. 세네갈대사관은 그들과 똑같이 취급하며 나를 받아주지 않았다. 처음에는 금요일이어서 주말에는 업무를 보지 않으므로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 일이 나를 감비아에 일주일 넘도록 머물게 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감비아 아이들의 해맑은 표정.
월요일에 다시 오라는 말에 기운없이 걷고 있는데, 어디선가 함성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따라 가보니 학교 운동장에서 축구경기가 벌어지고 있었다. 같이 응원을 하면서 구경을 했다. 바로 전의 일들은 까마득히 잊어버린 채 신나서 응원을 했다. 그때 들려오는 낯선 한국말에 돌아보니, 감비아 여자아이였다. ‘조이’라는 이름의 그 아이는 한국 사람이 있는 곳으로 나를 안내해 줬다. 그곳에서 한국말을 배웠다고 했다. 그곳은 한 한국인 선교사가 활동하고 있는 곳이었다. 큰 교회는 아니었고, 작은 집에서 주민 몇 명이 모이면 성경공부를 하고 이들에게 식사를 만들어 주고,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감비아는 이슬람교도가 대부분이고, 약간의 기독교인이 있다. 그리고 종교에 대해서 비교적 관대한 편이다. 작은 마을에도 이슬람사원이 있지만 여자들이 히잡을 두르고 다니는 정도는 아니다.

감비아인들은 기독교 선교활동을 하는 이들을 내치지 않았고, 선교활동을 하는 한국인들도 나를 내치지 않았다. 세네갈 비자를 기다리는 이틀 동안 이곳에서 숙식을 제공받을 수 있었다. 작은 교회는 예배 공간보다는 감비아 아이들의 놀이터로 더 많이 사용되고 있었다.

이틀을 이곳에서 보낸 후, 세네갈 대사관에 가서 비자를 신청했다. 또 그들은 나를 힘들게 했다. 이틀 후에 찾으러 오라고 하면서 비자피(visa fee)도 많이 받았다. 갈 곳은 없지만 다시 배낭을 메고 거리로 나왔다. 대사관이 멀기 때문에 반줄로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세네갈 비자만 받으면 다시 세네갈로 가서 작은 마을들을 여행하면서 다카르까지 갈 계획이었지만 모든 일이 뜻대로 되진 않는다. 다시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을 때 차 한 대가 멈췄다. 다행히 그 차를 얻어 탈 수 있었다. 그러나 반줄로 들어가는 다리 전까지밖에 차가 가지 않아 거기서 내려야 했다. 바닷가로 향하는 강줄기에 눈이 부셨다. 감비아에서 뜻하지 않게 더 머물게 되면서 나의 감비아 여행은 계속된다.

강주미 여행작가·‘중동을 여행하다’의 저자  grimi79@gmail.com

<세계섹션>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비웨이브 아인 '미소 천사'
  • 비웨이브 아인 '미소 천사'
  • 비웨이브 제나 '깜찍하게'
  • 정은지 '해맑은 미소'
  • 에스파 카리나 '여신 미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