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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인간의 얼굴이자, 한 시대의 얼굴… 영원한 그림의 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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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4-04-07 20:17:25 수정 : 2014-04-08 07:4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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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완식이 만난 사람] 25년간 초상화 그려온 이원희 화백 삶은 대게를 능란하게 가위로 잘라내 살을 발라내는 솜씨가 유명 호텔 레스토랑 셰프를 연상시킨다. 문어는 또 어떤가. 적당한 온도에서 삶아내 입안에서 살살 녹는다. 범상치 않은 요리솜씨다. 손맛이 일품인 화가 이원희(58·계명대 서양화과 교수)를 오랜만에 그의 평창동 작업실에서 만났다. 음식과 함께 그가 와인 몇 병을 꺼내놨다. 그의 입에서 와인의 테루아(와인맛을 좌우하는 포도 재배 환경)가 줄줄이 꿰어져 나왔다. 요리하는 화가로 알려진 그의 손맛은 붓맛이 됐고 그림맛이 됐다. 그림을 잘 그리는 작가는 음식솜씨도 좋다는 통설을 그에게서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그는 담백한 풍경화로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그의 그림은 시각적인 전달에만 그치지 않고, 풍경을 둘러싼 정서, 분위기를 공감각적으로 전달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마치 시각, 후각, 미각의 감각을 종합적으로 동원해서 와인의 테루아를 경험케 해주는 것 같다.

어느 시기부터 그는 여성 누드와 인물초상에 몰두하고 있다. 장르의 다양성을 통한 미술품 수요의 확대도 염두에 뒀다.

“무엇을 그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서양미술사를 훑어보아도 소재를 한정적으로 다룬 화가는 없는 것 같다. 화가는 무언가를 그려야 하는 숙명을 타고난 존재다.” 그의 그림에 대한 지적 호기심과 탐구가 서양화의 전통적인 주제인 인체로 작업의 관심이 이동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는 국내 초상화 시장이 침체돼 있는 것을 안타까워 한다. 조선조 ‘전신초상’이라는 빛나는 전통이 있음에도 말이다.

“외국 유명미술관 회화 전시작 중 70∼80%는 초상작업이다. 그러나 우리는 ‘초상화=영정사진’으로 점점 더 영역이 한정돼 가는 것 같다. 한 인간의 얼굴이자 한 시대의 얼굴이라는 점에서 영원한 그림 주제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그는 초상화는 비교적 안정적인 수요가 있어 젊은 작가들이 커가는 데 디딤돌이 될 수 있는 영역이라고 했다.

“우선 진로를 고민하는 제자들에게 초상화도 하나의 길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미국 뉴욕엔 초상화 콘테스트가 있다. 이를 통해 화가와 상류층이 연계돼 작업이 활성화되고 있다. 한국도 미술 저변 확대를 위해 초상화 콘테스트 같은 것이 있었으면 한다. 그래야 역량 있는 작가들이 많이 나올 것이다. 현대 작가의 초상 중에서 국보급 회화가 나오지 말란 법이 있나.”

그는 1990년대 중반 연수차 러시아 레핀스쿨을 찾은 뒤로 매년 학생들과 함께 찾곤 했다. 유화로 인물을 표현하는 테크닉의 묘미를 하나둘 가르치기 위해서다. 이탈리아 피렌체의 우피치미술관 등 서구 유명미술관도 현장 학습의 단골 장소였다.

“본격적으로 초상화를 그린 지 올해로 25년째다. 주문은 꾸준하게 들어오고 있다. 수요는 충분하다는 얘기다. 다만 잠재 수요가 제대로 개발돼 있지 않은 게 문제다.”

그는 그동안 우리 사회의 지도층 인사 300여 명의 초상 작업을 했다. 사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조선시대 상류층 문화였던 초상화는 그 맥이 끊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양화 쪽에서 이당 김은호 선생이 서양화 기법으로 초상을 그리려는 노력을 계속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한국 미술계는 일본을 통해 서양미술을 받아들이다 보니 인상주의와 표현주의 계통만 받아들였다. 19세기 고전주의 화풍에 대한 습득이 미흡할 수밖에 없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버킹엄궁에서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만나는 모습을 그린 작품 앞에 선 이원희 화백. 그는 “사진과 달리 사람 손만이 담을 수 있는 온기가 담겨 있다”고 말한다.
한국화단에서 서양화 초상 전통은 김인승 박덕순 김숙진 김태 구자승에서 그로 이어지고 있다.

“대학원 시절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았다가 단원 김홍도와 이명기가 합작해 그린 ‘서직수 초상’을 보고 전율을 느낀 것이 계기가 됐다. 그동안 무수한 시행착오를 겪었다.”

그는 1990년 한 기업인의 의뢰로 유화로 초상을 그리면서 초상화 작가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풍경화 장르처럼 부침이 심한 장르가 없다. 그래서 부업을 한다는 생각으로 주문을 수락했다. 이제는 본업처럼 됐다.”

그는 초상화 작업을 할 때 원칙이 있다. 당사자를 반드시 만나서 대화가 무르익었을 즈음 사진을 찍는다. 비서진이 있으면 반드시 현장에서 떠나도록 조치한다. 그렇지 않으면 근엄한 표정만 짓기 때문이다. 그렇게 찍은 여러 장의 사진 중 하나를 골라 스케치로 먼저 옮겨 본 후, 유화 작업을 한다. 박근혜 대통령 초상도 2009년 세 차례 만나 찍은 사진을 바탕으로 그린 것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초상도 그의 작품이다. 국회의장, 헌법재판소장 등 공공기관의 의뢰를 받아 기관의 수장을 그리기도 했다.

오는 11일부터 30일까지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리는 그의 초상화 전에는 박 대통령 초상 외에도 김영삼 전 대통령, 화가 권옥연(작고), 화가 이성자(작고), 건축가 승효상, 황창규 KT 회장, 배우 고두심, 가수 이은미, 박원순 서울시장의 초상도 전시된다.

이원희 화백은 이번 전시를 위해 인물이 중심이 된 기록화에도 도전했다. 지난해 11월 박근혜 대통령이 영국 국빈 방문 당시 엘리자베스 여왕 부부와 포즈를 취한 사진을 대형 화폭에 옮겼다.

“청와대를 몇 번 출입해봤는데 역대 대통령 초상화만으론 장소성을 느끼기에 부족하다는 생각을 했다. 중요한 역사적 순간을 기록화로 남긴다면 외국 정상 등 귀빈들에게 이를 자연스럽게 알리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는 주변의 화랑주인 등 미술인들의 초상화도 즐겨 그린다. 그림으로 인연의 역사를 만들어 가기 위해서다.

김용건·하정우 부자 초상(2014, 캔버스에 유채, 97×162㎝)
“20년 전에 그린 인물을 요즘 다시 만날 때가 많다. 세월의 변화로 얼굴에 주름들이 하나 둘 늘었다. 하지만 젊은 시절의 초상화는 영원한 청춘으로 역사가 된 모습이다.”

요즘 국내 초상화 가격은 호당 5만원에서 200만원까지 다양하다. 이 화백의 초상화 가격은 매년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서구 유화전통을 소화시켜 이 시대의 초상화를 구현하고 있는 노력에 대한 화답이라 할 수 있다.

“정신성을 중시하는 우리 초상화의 ‘전신사조’, 특히 영·정조 시대에 꽃피웠던 사실주의 전통을 서구 고전주의 초상화와 수평적으로 접목시키려 노력했다.” (02)720-1020

편완식 미술전문기자 wansi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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