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경 소리다/ 소낙비// 경판각 앞마당/ 자박자박// 가슴속 돌부처/ 눈물로 깨우고 있는// 무량한/ 소낙비 소리”(‘소낙비’)
참선하는 스님 뒤로 소낙비가 내린다. 자박자박 들리는 그 소리, 무심(無心)의 능선을 타려는 선승의 가슴속 현 하나 건드린다. 아뿔싸 허물어지는 마음 소낙비 소리 독경 삼아 다잡을 밖에. 선명한 이미지가 청각을 배경으로 청정하게 다가드는 시편이다. 짧은 시의 여백에는 읽는 이들마다 자신만의 상념을 채울 수 있다. 더 짧은 이 시는 어떤가.
“창 밖에 걸어 놓은// 등불 하나// 고독한 섬이// 바람의 둥지를 흔든다”(‘등대’)
긴 말이 필요 없는 그림이다. 바람이 등대를 흔드는 게 아니라 섬의 고독이 ‘바람의 둥지’를 흔든다는 역설이 북받친다.
최동호(66·고려대 명예교수) 시인이 펴낸 7번째 시집 ‘수원 남문 언덕’(서정시학)에 실린 시편들 중 일부다. 짧으면서도 극적 드라마가 내재된 ‘극서정시’를 주창해온 평론가이자 시인인 그가 자신의 생각을 뒷받침하는 실천적 산물이다.
최 시인은 경남대, 경희대, 고려대 교수를 거치며 내로라할 시인과 평론가만 70여명 넘게 배출한 소문난 스승이기도 하다. 평론가의 위상에 중심이 실릴 수밖에 없는 교직에서 은퇴한 뒤 시에 방점을 찍고 펴낸 시집이어서 더 눈길이 간다.
“짧고 간결하고 깊고 울림이 있는 ‘극서정시’야말로 디지털시대의 시대정신입니다. 최근 우리 시단은 길고 장황하고 난삽한 쪽으로 많이 가고 있어요. 여백을 거느리는 성찰이 필요합니다. 시 본연으로 돌아가서 줄이다 보면 일행 시, 일자 시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새 시집을 펴낸 최동호 시인. 짧고 반전이 있는 ‘극서정시’를 주창해온 그는 “결국 그 길은 하이쿠도, 시조의 길도 아닌 신라시대 향가로 돌아가는 길이었다”고 말했다. |
이번 시집은 고향인 수원에 돌아가 그곳 주민들과 시를 매개로 어울리며 유년의 기억으로 회귀해 생의 뿌리를 더듬는 정서가 또 하나의 축이다. 최 시인은 고려대에서 은퇴한 뒤 ‘수원 남창동 최동호 시 창작교실’을 열어 2년째 진행하고 있다. 12주 코스로 진행되는 이 강좌에는 현직 교장에서부터 배추 농사를 짓는 이들과 80대 노인에 이르기까지 매 시즌마다 100여명 가까운 시민들이 참여하는 진풍경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강사들도 처음에는 무심코 왔다가 한겨울 빙판에 미끄러져도 목발을 짚고 눈보라를 헤치며 나오는 이들의 뜨거운 열정에 감응해 자발적인 재능 기부를 하고 있다고 시인은 전했다. 시간이 남아도는 이들의 호사 취미가 아니라 생활 속에서 시를 건져내고 향유하는 일이야말로 문학의 본령을 실천하는 행위일 터이다.
자퇴 후 53년 만에 최근 수원중학교 명예졸업장을 받은 시인은 서문에 “이 시집을 수원 사람들에게 바친다”고 명기했다.
그는 어린 시절 수원 ‘화령전’에서 만난 작약꽃을 “내 영혼에 아름다움을 점화시킨 최초의 불꽃”이라고 기억하거니와 그 전율을 이번 시집에 4행으로 음각했다.
“첫사랑 시의 입맞춤 남몰래// 화령전 붉은 기둥에 새겨놓고// 나비 날아간 그 꽃밭 사잇길// 누가 볼세라 잠 못 든 어린 날”(‘화령전’)
글·사진=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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