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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길 전철 안에서 만난 ‘닥터 지바고’
청춘은 지나가고 ‘생활’만이 부글부글
“아침에 전철에서 닥터 지바고 뮤지컬 광고를 본 순간/ 귓가에 라라의 테마곡이 맴돌더니/ 다닥다닥 붙어 서 있는 승객들이 자작나무로 보이기 시작한다/ 홀로 있으면 초라해 보이다가도 군락을 지으면 금세 늠름해지며/ 혁명의 냄새를 피운다는 그 자작나무// …청춘은 지나갔다/ 다만 생활만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 이 중년의 사내를/부르는 자 누군가”(‘손풍금 소리’)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는 여러 층위를 지닌 명작이다. 러시아혁명기 여린 시인이 겪어야 했던 시련을 축으로, 혁명과 사랑 혹은 불륜을 아우르는 작품 아니던가. 모스크바에 유학해 유독 북방정서에 민감한 정철훈(55·사진) 시인에게 출근길 서울 전철에서 만난 ‘닥터 지바고’는 간단한 자극이 아니었을 터이다.

격렬한 청춘이 지나간 자리에 부글부글 끓고 있는 생활이라니. 정철훈의 ‘빛나는 단도’(문학동네)는 거창한 혁명이나 사랑의 ‘청춘’을 지나온 중년의 일상이 스며든 시집이다. 지나왔어도, 아물거려도, 아픔과 회한은 검질기다.

“일회용 종이컵이 엎어진 채/ 내용물을 쏟아내고 있다/ 내용물은 경사면을 따라 길고 느리게 흐른다/ 흥건하게 젖어 나를 따라오는 흐름 혹은 흐느낌// (중략)// 아무 이유도 없이 담겨 있다가/ 원망도 절규도 없이 쏟아져내린/ 저 이별의 기술”(‘이별의 기술’)

원망도 절규도 없이 기억들과 저리 간단하게 헤어질 수 있다면 좋을 테지만, 어렵다. 반추하고 삭이고 넘기면서 덤덤해서 오히려 슬퍼질 때까지 살아내야 한다. 기억 속에 어떤 것은 신파요 뽕짝일 수 있지만 얼다가 녹고 녹다가 얼어야 봄이 오는 것처럼 기다릴 수밖에 없다.

“기억들이 얼다가 녹고 녹다가 어는/ 겨울의 땅이 내 안에 있는 게 분명하네/ 빨랫줄은 영원한 신파며 영원한 뽕짝/ 오래전 실종된 것들이 눈에 보이니/ 이 침침한 봄날이야말로 신기루인 것이지”(‘제국카페에서 쓰는 편지’)

러시아 외교과학원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고 1997년 ‘창작과 비평’에 시를 발표하면서 시인으로 출발한 이래 장편소설도 펴내면서 활발하게 전방위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는 정철훈은 이번 시집 서문에 “우연과 필연으로 타오르는 운명의 폭탄”이 시간인데 “앞으로만 진행하는 한, 우리는 모두 지나갈 뿐”인 그 시간에 “언어의 피, 시의 피”를 묻히고 싶다고 적어놓았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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