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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현칼럼] 하늘을 나는 립스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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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4-04-10 21:43:30 수정 : 2014-04-10 21:4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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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배 바가지 상혼 이제야 보는 관료사회
‘실사구시’ 과제서 체감 가능한 성과 내야 국민 감동의 길 열려
“백수가 과로사한다”고 쓴 적이 있다. 2010년 ‘설왕설래’ 지면에서였다. 임종 직전까지 몸단장에 진력한 프랑스 루이 15세의 애첩 퐁파두르 부인이 시종에게 유언처럼 남긴 말도 소개했다. 그것은 이렇다. “내 루주 단지를 가져다 다오.”

어제 조간에 ‘수입품 가격’을 다룬 기사가 비중 있게 실렸다. 수입가격이 1423원인 어떤 립스틱은 2만1150원에 팔린다고 한다. 14.9배의 바가지다. 외제 립스틱의 평균 판매가는 수입가의 9.2배로 조사됐다. 최악의 경우인 14.9배보다는 덜하지만 이 또한 터무니없다. 그래서 퐁파두르가 생각났다. 그의 루주 단지는 얼마짜리였을지도 실없이 생각했다.

팝아티스트 앤디 워홀은 “사람들이 크림을 바르고, 털을 뽑고, 빗질하고, 얼굴에 뭔가를 바르고, 풀질하는 데 인생을 쓰고 싶어한다면 그것 역시 좋은 일이다. 그들에겐 의미 있는 일일 테니까”라고 했다. 이런 관점은 립스틱에도 적용될 수 있다. “소비자가 바가지를 쓰고 싶어한다면 그것 역시 좋은 일”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바가지도 바가지 나름이다. 14.9배라면 퐁파두르도 격분해 관에서 뛰쳐나오기 십상이다.

화장을 금기시한 시대가 없지는 않다. 영국 의회는 1770년 포고문을 냈다. “향수, 화장품, 틀니, 가발 등으로 국왕 폐하의 백성을 유혹해 결혼에 이르게 하는 여자는 마법을 부린 자에게 적용하는 처벌을 받을 것”이란 경고였다. 중세 암흑기엔 더했다. 어떤 식으로든 얼굴을 고치는 것은 신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됐다.

그러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욕망은 제도적 억압을 이겨내는 법이다. 립스틱 부류의 화장품은 꿋꿋하게 살아남았다. 영국 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립스틱 생산을 막았다. 그래서 수요가 사라졌을까. 암시장만 붐볐을 따름이다. ‘립스틱’의 저자 제시카 폴링스턴에 따르면 같은 시기 미국에서 가장 공급이 달린 물품 또한 립스틱이었다.

이승현 논설위원
14.9배 판매가는 이런 본능을 정조준한다. 겨냥은 정확하다. 하지만 악덕상혼의 그늘이 너무도 짙으니 탈이다. 관세청은 칠레, 프랑스, 미국산인 10개 공산품의 수입·판매가를 이례적으로 공개했다. 립스틱이 가장 심하지만 와인, 등산화, 진공청소기 등 다른 품목의 바가지 성향도 만만치 않다. 평균 판매가는 수입가의 2.7∼9.2배다. 립스틱이 하늘을 나는 격이라고나 할까. 국내 소비자가 봉으로 치부되는 시장 현실 앞에서 혀를 차지 않을 수 없다.

인류에게 풍요를 선사한 시장경제는 저절로 생겨났다. 1974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프리드리히 하이에크가 시장경제를 ‘자생적(自生的) 질서’라고 규정한 이유다. 국가 권력이 함부로 개입해 질서를 어지럽히는 짓은 삼가야 한다. 하지만 시장경제를 왜곡시키는 독과점, 무임승차 같은 독소마저 방치할 일은 아니다. 정부가 눈을 감는 것은 명백한 직무유기다.

박근혜정부는 ‘창조경제’를 외치고 ‘국민행복’을 장담한다. 막연한 구호다. 국민이 피부로 체감하기도 힘들다. 섣불리 예단할 계제는 아니지만 그런 담론에서 가시적 성과를 내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실사구시형의 정책 과제에서 체감 가능한 성과를 낼 필요가 있다. 립스틱이 제격이다. 가격 거품을 확 빼야 한다. 그래야 국민 감동의 길이 열릴 수 있다.

바가지 가격은 독과점 유통 구조와 고가 마케팅 전략에서 비롯된다. 병행수입 시장의 진입 장벽을 낮추는 등의 정부 해법도 그런 진단에서 나왔다. 일단 정부가 발표한 ‘독과점적 소비재 수입구조 개선방안’이 제대로 실행되도록 빌 국면이다. 하지만 한탄도 곁들이게 된다. 소비자를 바보로 만드는 유통구조의 문제점이 지적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정부 관료들은 그간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기에 이제야 정색을 하는 것인가.

퐁파두르 부인은 몸단장에 사력을 다했다. 왕의 애첩이었으니 어찌 보면 할 일을 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역사에 남았다. 이 시대를 사는 관료들은 그 무엇에 사력을 다해 역사에 남을 것인가. 립스틱 가격과 싸우면서 깊이 성찰할 일이다.

이승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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