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지는 ‘칸나-X-타나토스’는 부산 국제신보 편집국장 겸 주필로 일했던 언론 현장이 배경이다. 진보당 조봉암이 사형당한 날 주필로서 “조봉암은 죽어도 진보 사상은 살아있다”는 명백한 지침을 내리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후일 5·16 쿠데타가 일어난 지 엿새 후 “조국은 없고 산하만 있다”는 내용의 논설을 썼다는 이유로 혁명재판소에서 10년형을 선고 받고 2년6개월 복역해야 했던 맥락과 이어진다. 이병주는 이 단편 모두에 “어떤 날 또는 어떤 일을 기록하기 위해서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말을 찾아야만 하는 경우가 있다”면서 “그것도 냉장고에서 언 그런 얼음이 아니라 북빙양 깊숙이 천만년 침묵과 한기로써 동결된 얼음처럼 차가운 말이라야 한다”고 썼다. 기억의 부패를 막기 위해서는 그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세 번째 수록작 ‘중랑교’도 주변 사람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풀어나가는 형식이다. 그는 번지 없는 분위기의 중랑교 부근 목로주점을 떠올리면서 올곧고 따뜻하고 재기가 넘쳤던 벗 박희영을 추억한다. 부록으로 지리산에 대한 날것의 자료들을 모은 ‘풍류 서린 산수’와 ‘지리산학’을 추가했다. 평론가 고인환은 “이병주는 문학이자 기록, 기록이자 문학인 작품을 지향”했다면서 “이는 경직된 이념을 타자화하는 것이며 신념을 인간화하는 방법”이라고 평가했다. 이병주는 기록과 픽션 사이에서 누구보다 뜨겁게 자신의 내면을 경작하다 간 인물이었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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