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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애의 영화이야기] 우리가 잘 몰랐던 최초의 한국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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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4-04-19 08:42:00 수정 : 2014-04-19 20:4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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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리적 구토' 김도산 감독
우리는 ‘최초’나 ‘원조’란 말에 관심이 많다. 어떤 사실이든 사람이든 뿌리와 시작을 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최초의 한국영화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요즘 대학생들에게 최초의 한국영화를 물어보면 의외로 많은 학생들이 ‘아리랑’(감독 나운규·1926)라고 대답하고는 한다. 

하지만 최초의 한국영화로 공식적인 평가받고 있는 영화는 ‘의리적 구토(義理的 仇討)’(감독 김도산·1919)다.

여기서 공식적이라고 표기한 이유는 이 영화가 개봉됐던 10월27일이 현재 우리나라에서 ‘영화의 날’로 제정돼 있기 때문이다. 당시 신문 광고나 기사들을 보면, 이 영화는 꽤 주목을 받았고, 인기도 얻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작자 박승필은 당시 단성사 사장으로서 외국영화만 상영하는 현실이 부끄러워 직접 제작에 나섰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런데 이 영화를 과연 최초의 한국영화로 볼 수 있겠느냐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일제강점기 동안 우리나라에서 제작된 영화들을 한국영화로 볼 수 있겠냐는 시선은 제외하더라도 말이다.

먼저 이 영화를 아예 영화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이 있다. 이 영화는 ‘연쇄극(連鎖劇)’ 혹은 ‘키노드라마(kino drama)’라고 불리는 형식이었는데, 영화와 연극이 연쇄적으로 즉 교차적으로 보여 지는 일종의 공연물이었다. 연극적 무대로 표현하기 힘든 부분을 미리 촬영해온 영상으로 보여주는 식으로 무대 위 배우가 영화 속에 등장했고, 한강 철교 등의 풍경도 나왔다고 한다. ‘의리적 구토’가 개봉된 1919년 세계적인 영화의 대세는 장편 극영화였으니 연쇄극을 영화로 보기에는 부족하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이 영화에 참여한 인력 중 일본인이 포함되었다는 점도 ‘최초의 한국영화’라는 수식어에 적합하지 않다는 주장의 근거가 된다. 제작자와 감독, 출연 배우들은 모두 한국인이었지만, 촬영과 편집을 담당한 사람은 미야가와 소우노스케라는 일본이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였던 당시 일본인의 참여는 관점에 따라 정통성을 훼손하는 요소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리적 구토’가 최초의 한국영화로 평가받을 수 있는 이유는 처음으로 한국인 주축이 되어 한국인의 자본으로 한국인의 이야기를 다뤘기 때문이다. 

연쇄극은 그것이 처음 등장했던 일본에서도 그렇고, 우리나라에서도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연쇄극이 등장한 배경은 일본과 한국이 영화 제작에 있어 후발주자였기 때문이었다. 일종의 과도기적 영화 제작 방식이었다.

1919년 매일신보
사실 세계 최초의 영화라고 평가되는 뤼미에르 형제나 에디슨이 제작한 영화도 요즘 관객들이 보기엔 그저 짧은 영상 클립에 불과하다. 1분이 채 되지 않는, 그저 주변 풍경이나 일상을 아무런 편집이나 카메라 움직임 없이 기록한 이런 영화부터 시작해 영화는 끊임없이 변화했다.

여러 논란거리를 안고 있기는 하지만 ‘의리적 구토’에게 최초의 한국영화란 타이틀을 붙이지 모할 결정적인 이유는 없다. 어찌됐건 영화 카메라를 이용해 동영상을 촬영, 일반인들에게 공개했다는 게 중요하니 말이다. 게다가 영화 촬영 경험이 없는 우리나라에 촬영과 편집 같은 기술 노하우를 확보한 인력이 있을 리도 없었으니 참여 인력에 대한 너무 빡빡한 기준도 적절치 않다.

우리나라에서는 1903년경부터 일반인을 상대로 유료 영화 상영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1919년이 되어서야 영화 제작이 시작될 수 있었던 이유는 해외에서 들여와야 하는 영화 촬영 장비와 기술 인력, 제작비 등이 모두 짧은 시간에 확보 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었다. 자동차나 휴대전화 등 해외에서 먼저 개발된 제품들이 국산화 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과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필자는 영화 ‘아는 여자’(감독 장진·2004)의 개봉 전 이벤트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당시 제작·배급사에서는 관객 프로모션 일환으로 영화와 공연을 함께 보여주는 이벤트를 열고, ‘국내 최초 키노드라마(연쇄극) 공연’이라는 홍보 문구를 내걸었다. 키노드라마는 최초의 한국영화에서 이미 오래 전에 사용된 방식이었으니, 당시 ‘최초’라는 문구가 안타깝고 서글프게 다가왔다.

아쉽게도 ‘의리적 구토’의 필름은 현재 남아있지 않아 볼 수가 없다. 그러나 비록 키노드라마의 형태에, 일본인이 참여한 영화였다고 해도 우리나라 영화 제작의 시발점이 된 이 영화를 오래도록 기억했으면 좋겠다.

서일대 영화방송과 외래교수 
사진=한국영상자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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