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백영철칼럼] 해병대 사령관의 세 가지 조건

관련이슈 백영철 칼럼

입력 : 2014-04-17 21:06:33 수정 : 2014-04-18 00:19:11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누구나 해병이 될 수 있다면 나는 결코 해병대를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빨간색 바탕에 노란색 글이 선연하다. 이 입간판은 포항 운제산 대왕암 앞에 서 있다. 천자봉으로 불리는 대왕암 오르는 길은 해병대의 상징적인 훈련 코스다. 신병들은 천자봉 행군을 마쳐야만 빨간 명찰을 가슴에 달 수 있다. 천자봉 행군은 해병의 혼이다. 천자봉 앞에서 해병은 진짜 사나이로 다시 태어난다.

MBC ‘진짜 사나이’는 “군대의 진짜 모습을 보여준다”며 1년 전 이맘때 시작됐다. 최전방 사단에도 다녀오고 함정을 타고 독도도 다녀왔다. 이 프로그램은 닫혀 있는 군을 시청자들에게 친숙하게 다가오게 했다. 억지가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만 공감대도 있고 재미도 있다. 군대 경험이 있는 남자들은 추억에 잠겨 “요즘 군대 많이 좋아졌네!”라며 본다. 군대 얘기라면 질색인 여자들도 “저렇게 군대가 재미있다니!”라며 빠져든다. 군대가 “청춘이 썩는 곳”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탈색한 것만 해도 성과다.

백영철 논설위원
‘진짜 사나이’들은 아직 해병대엔 가지 못했다. MBC는 해병대에 조금 어수룩한 사내들을 보내 진짜 사나이로 만들기 위해 몸이 달아 있다. 사장이 직접 나서거나, 예능 책임자가 다양한 루트로 요청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아직은 허사다. 이영주 해병대사령관이 세 가지 조건을 내건 것이다.

그 첫째가 천자봉 행군이다. “천자봉 행군은 해병대 창설 이래 해병이면 반드시 거치는 전통이니 출연진도 똑같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조건은 삭발이다. “해병처럼 옆과 뒤 머리를 팍 쳐 올려라”다. 셋째는 “오디션은 안 된다. 리얼로 하자”다. 세 가지 조건의 의미는 간명하다. “해병은 실전의 용사다. 예능을 한다면 최대한 제대로 하고, 진짜처럼 해보자”는 거다.

MBC는 3대 조건이 너무 까다롭다고 불만을 터뜨린다. “예능은 예능일 뿐”인데 너무 정색하는 것 아니냐는 입장이다. 이 지점에서 양측은 충돌한다. 해병대 사령부의 우려는 심각하다. 출연자의 엉뚱한 몸짓이나 웃자고 하는 언행이 해병대의 진짜 속살처럼 비치면 나사 빠진 군대가 되기 십상인 것이다. 군대가 웃음이 넘치는 곳이어야 하겠지만 군기가 엄정해야 하는 곳 또한 군대다.

해병대는 서해 5도 등에서 북한과 대적하고 있다. 얼마 전 북한이 서해 북방한계선(NLL) 너머로 포격을 했을 때 해병들은 세 배의 포격으로 되갚았다. 무자비한 응징! 지금 해병들에게 내려진 사령관의 지시다. 이런 판국에 가짜 사나이들이 가서 해병을 웃기는 곳으로 희화화해선 안 된다. 해병은 ‘충성, 명예, 도전’ 정신을 지켜내야 한다.

안보는 한순간 아주 작은 빈틈에서 무너진다. 2010년 11월 23일의 상처는 해병대 역사에서 씻어내고픈 기억이다. 북의 개머리 해안포기지에서 연평도의 군부대와 민가를 향해 불을 뿜어대 해병대 장병 2명과 민간인 2명 등 4명이 숨지고 민가·상가 등 42채의 건물은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했지만, 당시 해병대는 인민군의 포탄이 어디서 날아오는지도 몰랐다. “군이 나사가 빠져도 너무 빠졌다. 한심하고 처참하게 당했다.” 대통령 직속인 국방선진화추진위원회가 이듬해 내린 평가다. 최근 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이 군 경계의 실패를 자인했다. 국무회의에서 “북한제 추정 무인기가 우리나라를 전방위로 정찰한 사실을 군 당국이 전혀 파악하지 못한 것은 방공망과 지상정찰 체계에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했다. 또다시 우리 군에 나사가 풀렸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보수우파 정권이 야당으로부터 ‘안보무능’이라는 비난을 받는 것은 수치다.

이영주 해병사령관은 엊그제 15일 창설 65주년 기념식에서 “적이 도발하면 조금도 주저함 없이 신속·정확· 충분히, 무자비하게 응징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해병대만은 예능의 침투로부터 지켜주는 게 좋겠다. 재미있는 해병도 좋지만 우리에겐 귀신 잡는 해병의 전통을 지키는 게 더 중요하지 않은가.

백영철 논설위원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리센느 메이 '반가운 손인사'
  • 리센느 메이 '반가운 손인사'
  • 아일릿 이로하 '매력적인 미소'
  • 아일릿 민주 '귀여운 토끼상'
  • 임수향 '시크한 매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