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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세번째 시집 나란히 출간한 강은교·이시영 시인

입력 : 2014-04-24 20:20:21 수정 : 2014-04-24 2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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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교 ‘바리연가집’, 이승의 ‘바리’가 겪어내는 사랑의 만화경
이시영 ‘호야네 말’, 세상에 지친 이들에 전하는 ‘따스한 위로’
시력 45년을 넘긴 두 중진 시인이 나란히 신작시집을 상재했다. 1968년 ‘사상계’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문단에 나온 강은교(69)의 ‘바리연가집’(실천문학사)과 1969년 ‘월간문학’에 시가 당선돼 등단한 이시영(65)의 ‘호야네 말’(창비)이 그것이다. 꾸준히 활발한 창작활동을 해오며 독자들의 사랑을 받은 이들의 새 시집은 공교롭게도 똑같이 열세번째 소출이다.


“아, 거길 아는가/ 꿈길이 벼랑의 속마음에 깃을 대고/ 가슴이 진자줏빛 오미자차처럼 끓고 있는 그곳을/ 남몰래 눈시울을 닦는, 너울대는 옷소매들을, 돛들을, 떠 있는 배들을/ 배들은 오늘 어딘가 아름다운 항구로 떠날 것이다”(‘아벨 서점’)

칠순에 이른 강은교의 감성은 여전히 젊다. 가슴이 “진자줏빛 오미자차처럼” 끓는다. 이번 시집을 관통하는 주체는 표제에 명기한 것처럼 바리공주다. 온갖 수난을 겪고 저승에 가서 약을 구해와 자신을 구박했던 이들까지 살려내는 바리데기. 그네의 지난한 여정은 우리네 삶의 축도이거니와 이승의 바리가 겪어내는 사랑의 만화경이 푸른 무늬로 새겨진 시집이다. 

강은교
“사랑 하나 길을 건넌다/ 선뜻선뜻 정오를 건넌다/ 그 사랑 언뜻언뜻/ 구름바랑에 이고 지고// 사랑은 순간이 영원/ 영원은 사랑의 순간/ 우리를 결코 기다리지 않는, 혹은 소멸을 기다리는 것// 서걱서걱 기다리는 것”(‘사랑과 영원’)

서걱서걱 기다리는 사랑, 혹은 소멸의 순간을 기다리는 그 사랑은 순간이지만 영원이고 영원인 것 같지만 순간이라는 ‘바리’의 언설이 서글프다. 그 사랑을 ‘구름바랑’에 이고 지고 가는 길은 “서로의 가슴을 헤집고 피를 흘리며”(‘칼’) 걷는 저물녘의 “목메는 거리”일 수도 있다. 지나오고 보면 고통스러웠던 치명적인 사랑조차 ‘그리운 동네’ 풍경이다. 그 거리를 관통해 온 ‘나’는 “그리운 동네 외딴집이고, 누추한 가방이고, 낡고 낡은 구두”(‘그리운 동네’)가 된다.

“한 골짜기마다 사내 하나씩 만나/ 슥삼년/ 두 골짜기마다 황홀 하나씩 만나/ 슥삼년// 맨발로 서 있는 오르막/ 어룽어룽 그 계집// 에에루 업이야/ 어거영차 업이로다/ 어거영차 업이로다”(‘한 골짜기마다’)

‘황천무가’의 한 대목을 시에 인용할 만큼 바리의 여정은 한바탕 굿판이기도 하다. 본디 바리데기는 한국 무속에서 해원을 하는 오구굿의 등장인물인데 이 시집에서도 굴곡진 삶의 갈피마다 깃들었던 회한과 추억을 풀어내는 무당 역할을 하는 셈이다. 저기, 그 바리가 걸어간다.

“바리가 걸어간다/ 바리가 걸어간다/ 푸른 지평선 황토 치마 벌리고/ 한 모랭이 지나 화살표 사이로/ 두 모랭이 지나 화살표 사이로/ 바리가 걸어간다/ 마음 떨며 바리가 걸어간다// 휘날리는 저물녘 속 저 등불/ 찢어진 페이지 사이 미처 닦지 못한 저 눈시울/ 눈물자욱도 짙어라, 저 황금빛 옷고름”(‘서면’)

“양들이 조심조심 외나무다리를 건너 귀가하고 있습니다/ 곧, 저녁입니다”(‘곧’)

단 두 행짜리 이 시 한 편의 여백은 넓다. 읽는 이에 따라 다양한 사연과 그림을 적고 그려넣을 수 있는 광활한 공간이다. 시인의 생각을 자신만의 언어로 길게 늘어놓는 일방적인 작법과는 대척점에 서 있는 전형적인 시편이다. 이시영의 새 시집 ‘호야네 말’은 그가 그동안 추구해온 ‘이야기 시’의 바탕 위에 따스한 서정과 서경이 돋보이는 맑은 시편들로 그득하다.

이시영
“김포에서 갓 올라온 햇감자들이 방화시장 사거리 난전에서 ‘금이천원’이라는 가격표가 삐뚜루 박힌 플라스틱 바가지에 담겨 아직 덜 여문 머리통을 들이받으며 저희끼리 찧고 까불며 좋아하다가 ‘저런 오사럴 놈들 가만히 좀 있덜 못혀!’ 하는 할머니 역정에 금세 풀이 죽어 집 나온 아이들처럼 흙빛 얼굴로 먼 데 하늘을 쳐다본다.”(‘슬픔’)

가난해도 순정했던 어린 시절의 발랄과 나이 들어 돌아보는 그 시절의 아픔이 시장 난전에 나온 흙 묻은 햇감자에 투사된 정감 어린 시편이다. 시인은 “그동안 세상에 대해 저항하는 시를 써왔다면 이번 시집에서는 차분하게 내면으로 내려가 나와 세상을 바라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소통을 무시하면서 무의식의 첨단을 지향해야만 꼭 시가 되는 게 아니라 인간과 자연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서정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태풍 산다가 휩쓸고 간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맑다. 방금 3∼5세 아동들을 태우고 마포를 출발한 유아학교 버스가 뻥 뚫린 하늘을 마음 놓고 달리다 갓길에서 모자를 고쳐 쓰고 나온 구름경찰에 걸려 엉덩이를 뿅뿅거리며 딱지를 떼이고 있다.”(‘구름학교’)

이시영은 “어디 가서 ‘선생님’ 소리를 들을 때 제일 슬프다”면서 “나는 아직도 어린아이의 마음을 간직하고 싶은 평범한 시인!”이라고 ‘시인의 말’에 썼는데 구름이 ‘엉덩이 뿅뿅거리는’ 이 시편, 그 자부심에 값할 만하다. 삭막한 세상 지친 이들에게 청량하면서도 따스한 위로를 넉넉히 전해줄, 드문 시집이다. 숨을 타고난 것들에 대한 연민만으로도 눈가에 이슬이 자욱해지시는 이런 시는 어떤가.

“동면(冬眠) 정진(精進) 중이던 지리산 반달가슴곰님께옵서 어젯밤에 새끼 두 마리를 순산하시었다. 비칠비칠하고 고물고물한 것들이 어미 등을 찾아 기어오르려다 떨어지곤 떨어지곤 하는 것을 어미가 고개를 돌려 이윽히 바라보는데 그 눈가에 이슬이 자욱하시다.”(‘자욱하시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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