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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다시 새겨봐도 어이없는 100일간의 기록

관련이슈 여객선 '세월호' 침몰 사고

입력 : 2014-07-23 10:01:55 수정 : 2014-07-23 14:4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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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로 세월호가 진도 해역에서 침몰한지 100일째를 맞는다. 세월호 희생자가족은 물론이고 모든 국민들이 슬픔에 잠겼던 100일이었다. 또 철저하게 구조에 실패한 정부의 무능과 원인규명과 제도개선보다 정쟁을 일삼은 정치권의 모습에 대부분의 국민들이 분노했던 100일이었다.

◇4월16일 세월호 침몰, 허비한 '골드타임'…무의미했던 '에어포켓'

4월16일 수요일 오전 9시께. 서해 진도 해상에서 고교생을 태운 배가 침몰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많은 국민들은 이 때만해도 이 소식이 온 나라를 슬픔에 잠기게 할 비극의 시작이라는 것을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진도 해상에서 처음으로 조난신고가 접수된 시간은 4월16일 8시52분께였다. 오전 9시30분, 목포해경 경비정 123함이 현장에 도착해 구조활동을 펼쳤으며 오전 11시께까지 민간어선과 해경의 합동작전으로 승객들이 구조됐다.

오전 11시20분께 "단원고 학생들 전원 구조"라는 문자메시지가 발송됐고, 침몰한 세월호를 지켜보던 국민들은 안도했다.

그러나 이 소식은 완전 '오보'였다. 한 달이 지나서야 이 오보의 원인이 단원고 행정실장이 경찰의 무전 내용을 잘못 알아듣고 발송한 것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전원 구조'라는 오보가 발송되던 시간은 이른바 '골든타임'이었다. 이 시간에도 수 백명의 학생들은 차가운 바다속에 잠겨있었던 것이다.

사고 당일 집계된 사망자 숫자는 6명이었다. 구조된 사람은 172명이었다. 구조된 사람 중에는 세월호 선장 이준석씨를 비롯한 승무원 15명이 포함됐다. 이들은 세월호에 탑승한 학생들에게 "가만히 있으라"는 안내방송을 수차례 내보낸 뒤, 자신들은 배에서 탈출했다.

심지어 이준석 선장을 비롯한 일부 선원은 선원이라는 것을 숨긴 채 구조된 것으로 드러나 국민들의 공분을 사기도 했다.

이 때 만해도 정부와 세월호 탑승자들의 가족, 국민들은 거의 침몰한 배 안에서 학생들이 애타게 구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배가 에어포켓이 남아있어 생존 가능은 충분하다는 전문가들의 의견도 기대를 키웠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시간 이후 정부는 단 한명의 탑승객도 구조하지 못했다. 정부와 해경은 구조에 황금 같은 시간이라는 뜻의 '골든타임'을 우왕좌왕하며 허비했으며, 믿었던 에어포켓의 존재도 시일이 지나면서 무의미해졌다.

특히 정부와 해경이 허둥대는 사이에 지나가버린 '골든타임'은 뼈아픈 대목이었다. 검찰와 전문가들은 침몰이 후 약 6시간 가량을 승객들의 생존과 구조가 가능한 '골든타임'으로 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시간에 정부와 해경은 부실한 초기대응으로 화를 키웠다.

실제로 재난대책본부는 사고당일인 16일부터 18일까지 탑승자 숫자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허둥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3일동안 여섯 차례나 세월호 탑승자 숫자가 변경 발표되는 소동이 있었다.

해경은 부실한 초기대응의 '몸통'이었다. 중국어선 불법조업 단속 명목으로 중형함정을 모두 동원해 구조에 나설 배가 부족했고, 진도VTS의 모니터링도 소홀히 했다. 사고 발생 이후에도 해경은 세월호와의 교신에 적극적이지 않았으며, 현장에 도착한 해경함정은 아예 선실진입을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4월17일 시신수습 시작, 애타는 팽목항 …슬픔에 잠긴 대한민국

사고 다음날인 4월17일 박근혜 대통령이 처음으로 실종자 가족이 모여 있는 진도체육관을 방문했다. 박 대통령은 실종자 가족을 위로하고 구조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4월18일에는 구조됐던 강민규 단원고 교감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 주위를 슬프게 했다. 강 교감은 "모든 것이 내 책임이다. 침몰 수역에 유골을 뿌려달라"는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을 메 세상을 떠났다.

이어 사고 4일째인 4월19일 처음으로 민관군 합동구조팀이 선체 2층 화물칸을 열고 선체에 처음으로 진입해 시신 3구를 수습했다.

이때부터 세월호 승객들의 시신이 연이어 수습됐다고 볼 수 있다. 구조를 기다리는 가족들이 머물던 팽목항은 비탄에 잠겼다. 이를 지켜보는 국민들도 슬픔에 잠겼다.

4월20일 확인된 사망자는 58명으로 늘어났고, 21일에는 87명으로 늘었다. 22일에는 121번째 시신이 수습됐고, 23일에는 오전에만 시신 25구가 수습되는 등 사망자가 150명으로 늘었다.

그러나 세월호가 침몰한지 일주일이 지난 4월23일에도 실종자는 무려 152명에 달했다. 시신으로 수습된 사람보다 더 많은 인원이 아직 생사가 확인되지 않은 것이다. 4월24일에는 오전에 12구의 시신이 수습되면서 사망자가 171명으로 늘었다. 이때를 기점으로 사망자의 숫자가 실종자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불과 3~4일새 100여구의 시신이 수습되자, 단원고 학부모를 비롯한 세월호 탑승자 가족이 머물던 팽목항은 비탄에 빠졌다. 시신이 수습되서 돌아올 때마다 자녀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며 울부짖는 부모들을 보면서 국민들은 눈시울을 붉혔다.

세월호 침몰 희생자에 대한 구조작업이 한창이던 4월27일 정홍원 국무총리가 전격 사의를 표명했다. 정 총리는 "세월호 참사 이후 초동 대처 등에 정부를 대표해 사과를 드린다"며 사의를 표명했지만 국민들의 눈길은 차가웠다. 세월호 사고 수습이 한참일 때 사의를 표명하고 나선 총리의 모습이 아름답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후 4월30일까지 사망자는 210명으로 늘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수습되는 시신의 숫자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5~7월, 지지부진한 원인규명 책임자 처벌 …참사는 현재 진행 중

세월호가 침몰한지 보름이 지나 5월에 들어서자 시신 수습 속도가 현저하게 느려졌다. 5월1일부터 6일까지 시신 49구가 더 발견되는데 그쳤으며 6월과 7월사이에 수습한 시신은 6구에 불과했다.

이때부터 세월호 침몰사고의 원인과 책임 문제가 본격적으로 규명되기 시작했으며, 책임자 처벌 등을 요구하는 정치권과 시민사회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5월17일에는 처음으로 세월호 참사에 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등을 요구하는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서울에만 3만여명의 시민들이 모여 노란리본을 달고 세월호 참사 희생자의 넋을 위로했고, 박근혜 정부에 특별법 제정 등을 요구했다.

정치권에서도 정부의 부실한 초기대응을 질타하는 목소리가 빗발쳤다. 국회에서는 여야를 가리지 않고 해경을 비롯한 정부의 부실대응에 책임을 추궁했다.

결국 5월19일 박 대통령은 해양경찰청을 해체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공직사회 개혁방안'을 발표했다. 세월호 침몰이 대규모 참사로 이어진 주요 원인이 탁상공론을 일삼는 공직자들의 행태에 있다는 지적이 잇따르자 강도 높은 공직사회 개혁을 추진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6월2일에는 세월호 침몰사고 진상 규명을 위한 국정조사특별위원회가 시작됐다. 그러나 국회의 특별 위원회 활동은 국민에게 오히려 실망을 줬다는 평가가 나온다.

특별위원회는 속 시원히 사고 원인을 밝히고 정부의 무능을 질타하기는 커녕, 증인 선정과 사고수습을 놓고 사사건건 여야의 의견이 엇갈리면서 볼썽사나운 모습을 연출하기 일쑤였다.

급기야 세월호 참사에 사과한다며 사의를 표명했던 정홍원 총리가 6월26일 유임됐다. 세월호와 같은 참사가 다시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사회적 공감대는 많았지만 정치권에서는 '정치셈법'이 먼저였다.

결국 지지부진한 정치권의 움직임을 지켜보던 세월호 유가족 대책위원회 등 가족 15명은 7월14일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단식농성에 돌입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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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23일 현재 아직도 실종자는 10명이 남아있다. 대한민국을 비통에 빠지게 한 세월호 참사는 아직도 현재 진행 중이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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