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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스토리] “조국이 버린 영웅들… 가족들까지 무관심·홀대에 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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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4-07-26 06:00:00 수정 : 2014-07-26 15:5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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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국군포로가족회 한영복 회장
“몰랐던 게 아니다. 알았지만 행동하지 못했다. 대한민국이 그동안 비겁했다….” 지난해 9월 남재준 전 국가정보원장은 역대 원장으로는 처음으로 국군포로들을 만나 “그동안 국가가 (국군포로 문제에) 너무 소홀했다. 잘못했다”며 “그동안 섭섭하셨겠지만 앞으로는 다를 것”이라고 사과했다. 그리고 10개월이 지났다. 지난 24일 서울 만리동에 위치한 6·25국군포로가족회 사무실에서 만난 한영복(51·사진) 회장은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


“오늘도 비가 오지 않았으면 국방부 앞에서 시위를 하려고 했다”며 “정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국가를 위해 희생한 분들에 대한 ‘국가적 책무’를 다할 것이라고 강조하지만 늘 말뿐”이라고 꼬집었다.

한 회장은 2003년 12월 탈북했다. 한국에 정착한 이후, 2005년 설립된 6·25국군포로가족회에서 초기부터 활동하며 지난해 11월 회장직을 맡았다. 6·25국군포로가족회는 국군포로를 부친으로 둔 자녀들이 북한에서 탈북해 만든 단체다. 현재 98세대가 가입해 있다.

한 회장의 부친인 고 한진룡씨는 1948년 8월 국군에 입대해 6·25전쟁 당시 육군 8사단에서 위생병으로 근무하다 1951년 1월 부대가 전멸하면서 북한군 포로가 됐다. 이후 북한 평안남도와 자강도의 포로수용소를 전전하는 사이 6·25전쟁은 끝났지만, 한씨는 고향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한 회장은 “당시 북한이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국군포로 수천명을 세워놓고 가운데 선을 긋고는 ‘남고 싶은 사람은 여기, 남한으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은 저기에 서라’고 했다더라”며 “그러더니 남한으로 돌아가겠다고 움직이는 국군포로들에게 기관총으로 위협사격을 해 어쩔 수 없이 ‘남고 싶은 편’에 설 수밖에 없었다고 아버지께 들었다”고 말했다.

한씨는 함경북도 혜령의 학포탄광에서 광부로 평생을 보냈다. 한 회장은 “북한에서는 군대를 갔다 와야 당원이 되고 그래야 조금 먹고살 만한데, 국군포로 가족들은 ‘43호 가족’이라고 불리며 주홍글씨가 새겨져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며 “국군포로라는 ‘꼬리표’ 때문에 자신은 물론 가족들도 노동당원이 될 수 없고, 인민군 복무는 물론 대학 진학도 할 수 없어 ‘국군포로인 아버지 때문’이라는 원망도 많이 했다”고 토로했다.

한국에서는 입장이 달라지진 않았을까. 그는 “지난 10여년간 한국에서 지냈지만, 홀대받는 현실은 북한에서나 남한에서나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며 “북한에 아직 국군포로가 있음에도 당당히 송환을 요구하지 못하는 우리 정부에 적잖이 실망했고, 정부의 무관심에 또 한 번 버림받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고 전했다. 한 회장은 “귀환하지 못한 국군포로는 국가를 위해 목숨을 걸고 전투에 참여했다가 포로가 돼 갖가지 고초를 겪었고 가족들은 신분 때문에 온갖 차별과 상당한 고통을 받았다”며 “정부가 국군포로의 희생에 대한 예우와 포로가족의 생활안정을 위한 지원을 보다 강화해주길 바란다”고 정부에 촉구했다.

김선영 기자 007@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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