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비가 오지 않았으면 국방부 앞에서 시위를 하려고 했다”며 “정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국가를 위해 희생한 분들에 대한 ‘국가적 책무’를 다할 것이라고 강조하지만 늘 말뿐”이라고 꼬집었다.
한 회장은 2003년 12월 탈북했다. 한국에 정착한 이후, 2005년 설립된 6·25국군포로가족회에서 초기부터 활동하며 지난해 11월 회장직을 맡았다. 6·25국군포로가족회는 국군포로를 부친으로 둔 자녀들이 북한에서 탈북해 만든 단체다. 현재 98세대가 가입해 있다.
한 회장의 부친인 고 한진룡씨는 1948년 8월 국군에 입대해 6·25전쟁 당시 육군 8사단에서 위생병으로 근무하다 1951년 1월 부대가 전멸하면서 북한군 포로가 됐다. 이후 북한 평안남도와 자강도의 포로수용소를 전전하는 사이 6·25전쟁은 끝났지만, 한씨는 고향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한 회장은 “당시 북한이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국군포로 수천명을 세워놓고 가운데 선을 긋고는 ‘남고 싶은 사람은 여기, 남한으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은 저기에 서라’고 했다더라”며 “그러더니 남한으로 돌아가겠다고 움직이는 국군포로들에게 기관총으로 위협사격을 해 어쩔 수 없이 ‘남고 싶은 편’에 설 수밖에 없었다고 아버지께 들었다”고 말했다.
한씨는 함경북도 혜령의 학포탄광에서 광부로 평생을 보냈다. 한 회장은 “북한에서는 군대를 갔다 와야 당원이 되고 그래야 조금 먹고살 만한데, 국군포로 가족들은 ‘43호 가족’이라고 불리며 주홍글씨가 새겨져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며 “국군포로라는 ‘꼬리표’ 때문에 자신은 물론 가족들도 노동당원이 될 수 없고, 인민군 복무는 물론 대학 진학도 할 수 없어 ‘국군포로인 아버지 때문’이라는 원망도 많이 했다”고 토로했다.
한국에서는 입장이 달라지진 않았을까. 그는 “지난 10여년간 한국에서 지냈지만, 홀대받는 현실은 북한에서나 남한에서나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며 “북한에 아직 국군포로가 있음에도 당당히 송환을 요구하지 못하는 우리 정부에 적잖이 실망했고, 정부의 무관심에 또 한 번 버림받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고 전했다. 한 회장은 “귀환하지 못한 국군포로는 국가를 위해 목숨을 걸고 전투에 참여했다가 포로가 돼 갖가지 고초를 겪었고 가족들은 신분 때문에 온갖 차별과 상당한 고통을 받았다”며 “정부가 국군포로의 희생에 대한 예우와 포로가족의 생활안정을 위한 지원을 보다 강화해주길 바란다”고 정부에 촉구했다.
김선영 기자 007@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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