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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詩 쓰는 자유를 내려놓아 더 많은 자유를 누렸다”

입력 : 2014-07-28 21:29:40 수정 : 2014-07-28 21:2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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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의 나마스테!] ‘백석평전’ 펴낸 안도현 시인 전주에 내려가 안도현(53) 시인을 만났다. 그가 최근 공들인 ‘백석평전’을 낸 데다 지난 대선 때 문재인 후보의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아 일하는 과정에서 야기된 일련의 뒷이야기도 새삼 듣고 싶었다. 그는 지난해 박근혜 정부에서는 시를 쓰지 않겠다고 선언한 뒤 1년이 지나도록 시의 침묵을 지키고 있다.

백석(1912∼1996)은 1988년 이전까지만 해도 남쪽에서는 금기의 북한 시인이었다. 1936년 처음이자 마지막 시집 ‘사슴’을 펴낸 이후 분단 전까지는 가장 촉망받는 시인 중 한 명이었다. ‘높고 외롭고 쓸쓸한’ 북방정서를 체현하며 좌우를 막론하고 깊은 관심의 대상이었던 그는 북에 남았다가 결과적으로 시를 빼앗긴 채 쓸쓸하게 늙어간 시인이다. 김수영과 더불어 남쪽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가장 시가 많이 실린 시인이지만 북에서는 아직도 복권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목이 길고, 머리를 뒤로 넘겨 빗은, 콧수염의 한 사내가/ 거기 살고 있었다/ 단풍숲처럼 얼굴이, 귀도 붉은 아내와/ 공장으로 가려고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만지는 아이들과/ 손때로 윤이 나는 나무책상 하나와/ 늙지 않은 그 사내는 있었다, 백석 선생이었다/ 서울서 나온 ‘白石詩全集’을 먼저 보였더니/ 먼 옛날이 신천지였다고/ 처마 끝 고드름이 평안도 사투리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안도현이 ‘모닥불’이라는 시집에 수록한 시편 ‘白石 선생의 마을에 가서’ 중 일부다. 1989년에 나온 시집이니 벌써 25년 전 일이다. 그때부터 안도현의 시인 백석에 대한 애정은 이미 각별한 것이었다. 그가 최근 백석의 모든 것을 모아 그의 일대기를 상세하게 수록하고 해설한 ‘백석평전’(다산북스)을 펴냈다. 평전이 나온 지 한 달 만에 1만부 가까이 팔려나갔다.

백석은 당대 주류 시와 거리를 두고 자신만의 창법으로 독특한 세계를 구축했다. 안도현이 1980년 대학에 들어가 수사학을 배우면서 처음으로 접한 백석의 시는 놀라운 체험이었다.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깔끔한 그림을 보여주는 시작법은 신선하기 이를 데 없었다. 1987년 이동순 시인이 처음으로 백석 시집을 묶어내 연구와 향유의 단초를 마련한 데 이어 김재용 원광대 교수는 해방 이후 북한에서 발표한 작품과 행적, 산문까지 모아 ‘백석시전집’을 냈다. 안도현이 이번에 펴낸 ‘백석평전’은 이들의 노고를 기반으로 백석에 대한 오류를 바로잡고 자신만의 해석을 곁들인 종합판인 셈이다.

안도현은 “1980년대 중후반부터 백석의 정신과 시작 태도와 어투까지 무던히 베끼려고 노력했다”면서 “백석에 대해 사람들이 잘못 만들어놓은 평가를 바로잡는 건 내가 꼭 해야 할 숙제 중 하나였다”고 말한다. 그는 “백석이 한얼생이라는 필명으로 만주 만선일보에 시를 발표했다는 건 전적으로 잘못된 것일 뿐 아니라, ‘세계적 천재 시인’이라는 식으로 과도한 수사를 붙이는 일 또한 그에게 오히려 누를 끼치는 일이고, 심지어 ‘사슴’에 33편을 수록한 것을 두고 3·1운동 때 독립선언한 33인을 연계시키는 일 같은 어처구니없는 오도는 반드시 바로잡혀야 한다”고 덧붙였다.
심지어 백석의 시에 등장하는 어휘들까지 잘못 해석돼 굳어진 사례도 많다고 안도현은 안타까워한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예는 ‘흰 바람벽이 있어’에 나오는 ‘바구지꽃’을 박꽃으로 이해하는 대목이라고 했다. ‘박각시 오는 저녁’에 나오는 ‘바가지꽃’이 박꽃인 건 맞지만, ‘바구지꽃’은 분명 미나리아재비꽃이라는 것이다. 흰 박꽃과 노란 미나리아재비의 이미지는 차이가 크다. 이 밖에도 ‘주막’이라는 시의 ‘붕어곰’은 붕어를 고아서 만든 국이 아니라, ‘곰’이 평안도 방언으로 ‘찜’이라고 했다. ‘내가 외면하고’에 나오는 ‘달재생선’도 족보 없는 ‘달강어’가 아니라 ‘장대’라는 남쪽 바다의 물고기라고 교정했다.

백석은 고향인 평안도 정주의 부모 곁으로 해방 이후 갔다가 고당 조만식 선생의 통역비서로 잠시 일했고, 남쪽의 친일문인들 틈에 끼고 싶지 않아 북에 그냥 남았다고 했다. 월북시인이 아니라 재북 시인이었던 셈이다. 백석이 일제강점기에 친일 행적에 가담한 적도 없고 좌우 이데올로기에 휩싸이지 않은 점도 특이하고 귀한 이력이다. 사슴처럼 맑고 고아하던 ‘모던 보이’는 북에 남아 고군분투했지만 끝내 삼수갑산으로 쫓겨나 1962년 이후 더 이상 시를 쓰지 못하고 양치기와 농사꾼으로 30여년을 더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 그의 시를 아끼는 이들의 입장에서는 너무 안타까운 일이다. 그렇지만 안도현은 “시인으로서 백석은 방황과 절망의 쓴맛을 보았지만 한 사람의 인간으로 이승에서 보낸 시간을 결코 부정적으로 바라볼 필요는 없다”면서 “시를 쓰는 자유를 내려놓음으로써 백석은 더 많은 자유를 누렸던 것”이라고 평전에 썼다.

백석이 굽어보는 가운데 그의 평전에 사인하고 있는 안도현 시인. 그는 “문학은 싫다 좋다를 논리적으로 말하는 게 아닌 그 이상의 무엇”이라며 “문학은 나에게 선택이 아니라 운명이었다”고 말했다.
안도현은 지난해 7월 트위터를 통해 “박근혜가 대통령인 나라에서는 시를 단 한 편도 쓰지 않고 발표하지 않겠다”고 밝혀 논란에 휘말렸다. 그는 “절필선언으로 확대되는 바람에 당혹스럽긴 했지만 시를 안 쓰기로 한 건 맞다”면서 “그동안 메모조차 하지 않았고 처음에는 시를 안 쓰면 녹이 슬까봐 초조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마음이 편안하다”고 말했다. 고등학교 시절 이래 40여년 동안 한시도 시와 떨어지지 않았던 그에게 시 없이 살아온 지난 1년은 한마디로 규정하기 어려운 마음밭이었을 터이다. 솔직히 쓸쓸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나 하나 시를 안 쓴다고 시인들이 얼마나 많은데 문제가 있겠느냐”면서 “나 스스로를 묵정밭으로 만들어 시인으로서의 토양을 변화시키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나중에 다시 쓰게 되면 그동안 안 쓴 ‘죄’를 갚기 위해서라도 진짜 멋진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다”고 웃었다. 

박근혜정부에서 시를 쓰지 않겠다고 나선 데는 대선 과정에서 그가 올렸던 트윗이 ‘공직선거법상 허위사실공표 및 후보자 비방혐의’로 기소된 항소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대법원 상고심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도 작동했을 터이다. 그는 “시는 정치적 의향을 날것으로 표현하지 않고 비유로 말해야 한다는 게 장점이자 단점”이라며 “날 목소리로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자의식이 시를 포기하게 만들었다”고 부연했다. 문학은 “좋다 싫다를 말하는 차원을 넘어서는 그 이상의 것”이라는 신념 때문이라고 했다.

시인으로서 정치판에 끼어들어 상처를 받지 않았느냐는 질문에는 “상처보다는 상처를 감싸는 약을 더 많이 얻었다”고 답했고, 너무나 깊어진 한국사회 양극의 깊은 골을 메우는 데 시인이 나서야 되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는 “시인으로서 나는 정의와 정직이라는 기준을 놓고 최선을 다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는 지난 대선 과정에서도 문재인 후보에게 “당신이 대통령이 되더라도 나는 학교로 돌아갈 것”이라고 두 번이나 다짐을 했다고 했다. 안도현은 일찍이 백석을 인용한 제목의 시집에 이렇게 써놓았다.

“이것만은 버리지 못하겠다. 시에다 삶을 밀착시키고 삶에다 시를 밀착시키는 일, 그리하여 시와 삶이 궁극적으로 완전한 하나가 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거의 하나에 가까워지도록 만드는, 그 둥글디둥근 꿈 말이다. 모든 것들이 좀더 가난해지기를, 좀더 외로워지기를, 좀더 높아지기를, 좀더 쓸쓸해지기를.”(1994년 ‘외롭고 높고 쓸쓸한’ 자서)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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