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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정윤의 내밀한 미술사] <7> 벨테브레이와 하멜이 남긴 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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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4-08-14 22:26:47 수정 : 2014-12-01 12:5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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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항해’ 파란 눈의 청년들… 17세기 조선과 특별한 인연

오른발은 한국산 자동차, 왼발은 동인도회사의 상선을 신은 얀 야너스 벨테브레이의 동상은 조선시대의 사이보그처럼 보인다. 서울 올림픽이 열리던 해 엘리 발튀스에게 주문 제작된 이 동상은, 양국의 우호를 상징하기 위해 벨테브레이의 고향인 더레이프시와 서울 어린이대공원에 각각 설치되었다. 기운 배의 형상을 한 얼굴에 조선시대의 갓을 쓰고, 총기 제조술을 가르친 이력에 걸맞게 두 자루의 총을 옆구리에 휴대했다. 게다가 한국 공장에서 만들어지고 있던 삼성의 로고가 들어간 카메라는 앞가슴에, 그리고 등 뒤에는 구식 카세트 플레이어와 현대자동차의 부품 및 타이어를 주렁주렁 달고 있다. 평생 고국에 돌아가지 못한 벨테브레이의 어두운 이면을 잠시 잊고 좀 유쾌하게 풀어보자면, 얼떨결에 도착한 혈기왕성한 이국의 청년이 렌터카를 타고 종횡무진하며 카메라와 녹음기를 사용해 조선 땅에서 벌어지는 일을 생동감 있게 담으려는 모습처럼 보일 수도 있다.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에서 외계인 도민준이 1609년 조선 땅에 떨어진 것으로 설정되지 않았다면, 누가 뭐래도 1627년에 표착한 벨테브레이는 조선에 정착한 첫 번째 서양 귀화인이었다.


약 사반세기 뒤에 표류한 하멜과 그 일행들에게는 아버지뻘이 되는 연배였고, 박연이라는 이름을 갖고 조선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긴 세월 동안 조선인들과 나누었을 대화는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기록되지 않은 역사는 사라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13년간 억류생활을 한 하멜의 표류기(초판 1668년)는 처음으로 조선을 유럽에 소개한 서적이라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낭만적인 해석이 덧붙여졌다. 그러나 동인도회사가 설립된 이후 약 2세기 동안 1600점이 넘는 다양한 장르의 출판물이 발표되었던 점을 감안하면, 가볼 수 없는 나라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기본 정보를 제공하는 근세 기행문의 한 예로 평가할 수도 있다. 좀 더 넓은 틀에서 벨테브레이와 하멜의 조선에서의 시간을 돌이켜보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사료에 정통한 역사가이며 30년이 넘도록 신문사의 저널리스트로서 다수의 관련 저서를 집필한 룰로프 판헬더르(Roelof van Gelder·66)씨는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는지 들어보기로 했다. 그는 독일인 동인도회사 직원들이 남긴 사료 연구를 통해 암스테르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엘리 발튀스의 ‘얀 야너스 벨테브레이의 동상’(1988년). 하멜보다도 25년 이상 일찍 조선에 표착하여 처음 귀화한 서양인으로 알려진 그의 동상은 고향인 더레이프시와 서울 어린이대공원에 세워졌다. 그의 험난한 항해를 상징하는 배는 물론이고, 한국의 대표적인 기업의 로고와 제품들이 함께 표현되었다.
“하멜의 기록이 갖는 진의는 무엇이었을까요?” 암스털 강이 눈앞에 펼쳐진 판헬더르씨의 자택을 방문해서 물은 첫 질문이었다. 그는 17, 18세기의 동인도회사 직원들의 글 쓰는 스타일부터 소개하기 시작했다. 크게 나누어 2가지 유형이 있다. 항해 일기를 쓰듯 자신의 생각을 특별히 담지 않고 간단히 일상에서 일어난 일을 습관처럼 적거나, 밋밋한 형식에서 벗어나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내러티브한 성격의 글을 써 내려갔다. 하멜의 표류기는 자신이 겪었던 일을 보고하기 위한 객관적인 기술뿐 아니라 서술적인 기법도 복합적으로 사용되었다. 스토리텔링을 바탕으로 원고를 완성하여 애초부터 출판할 목적으로 쓰인 것 같다는 것이 그의 견해이다.

동인도회사의 활약상을 담은 책들은 이미 시장성이 충분했다. 특히 낯선 땅에서의 이색적인 모험담은 사람들에게 읽는 재미도 쏠쏠히 제공하였기에 출판업자들도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 같은 상황을 염두에 둔 많은 선원들은 본사에 의무적으로 보고할 내용의 기록 이외에도, 귀국 후 출판될 수 있는 경우를 대비해 별도의 필사본을 만들었다. 동인도회사의 업적이라고 하면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단순한 무역거래를 뛰어넘어, 선원들의 기록을 바탕으로 한 책들을 통해 정보와 과학적 지식을 널리 전파했다는 점에 있다. 

요르크 프란츠 뮐러의 자화상(17세기 말). 독일인이었던 뮐러는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에 지원하여 13년 동안 아시아의 각국에서 근무하였다. 지적인 호기심을 발휘하여 이국적인 식물과 풍습들을 드로잉으로 남기고, 자세한 관찰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의 앨범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수도원 부속 도서관으로 유명한 스위스의 상트 갈렌 도서관에서 볼 수 있다.
막연한 낭만적 환상을 버리고, 면밀하게 하멜 표류기를 읽을 필요가 있다. 집필 동기를 둘러싸고, 조선에 억류된 기간 동안 발생되지 않았던 월급을 청구하기 위해서였다는 지적이 빈번히 거론됐다. 그러나 판헬더르씨는 소식이 끊겼던 선원들이라 해도 밀린 임금을 청구하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기에, 굳이 책을 쓰면서까지 애써 증명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무명의 선원들의 삶을 오래 추적한 탓일까, 판헬더르씨는 오히려 젊은 나이에 먼 길을 떠나려고 결심한 청년들의 원초적인 동기에 대해 좀 더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마치 러시안룰렛 게임을 하듯 아슬아슬한 결정을 한 겁니다.” 위험한 항해를 통해 낯선 이국에서 일한다는 것에 대해 회의적으로 생각하고 마땅히 포기했어야 할 이유가 낙관적인 요소들보다는 훨씬 많았다. 아시아에 관한 온갖 공포스러운 소문을 들었을 테고, 위험한 항해를 마치고 다녀온 사람들의 경고도 숱하게 들었을 것이다. 무엇 하나 확실하게 보장되는 것이 없는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굳이 권총의 실린더를 돌리는 마음으로 승선을 했다. 독일과 스칸디나비아와 같은 주변 국가에서 지원한 사람들까지 합치면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제공한 취업시장을 통해 아시아로 간 사람들은 100만명에 이른다. 대부분 이와 비슷한 결심으로 진로를 결정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들이 머릿속에 그리는 최상의 시나리오는 당연히 돈과 재물을 얻고, 사회적으로 덕망을 받는 위치에도 오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와는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져 인생의 커다란 실패를 맛보게 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은 없었다. 

동인도회사 선원들의 삶을 비롯하여 문화와 사회적인 변화를 다각적으로 연구한 룰로프 판헬더르씨.
아무도 당첨 확률을 예측하기 힘든 게임에 자신의 모든 운을 건 선원들의 삶은 귀국 후 어떻게 달라질 수 있었을까. 넉넉한 임금을 밑천으로 고향에서 새로운 장사를 시작할 수도 있었다. 아니면 하멜처럼 낯선 세계에서 경험했던 일들을 책으로 쓴 후, 그것을 자랑스러운 이력서 내지는 최고의 신용장으로 삼기도 했다.

유력한 상인이나 정치가들에게 책을 헌정하며, 운명을 개척하는 용감함, 조직에 대한 충성심, 그리고 신앙심과 성실함을 어필하여 절호의 기회를 잡고자 했던 이들도 있었다. 반대로 성공의 기회를 잡지 못한 사람들은 뒤틀려버린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번뇌하고 술과 싸움으로 여생을 보내기도 했다. 그렇지 않으면 박진감 넘치는 삶을 그리워하여 또다시 항해의 길에 나서 영영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 같은 절박한 선택을 하는 사람들은 무릇 처절한 생활고에 시달리는 계급뿐이 아니라고 그는 강조한다. 건강한 신체를 타고나고 충분히 교육의 혜택을 받았지만, 자신의 미래를 위해 약간의 자금이 필요했던 청년들도 기꺼이 동인도회사의 직원으로 지원했음을 거듭 확인시켰다.

200년간 건재했던 동인도회사가 해양 무역을 통해 남긴 유산은 줄곧 경제적인 가치로 환원됐다. 이용된 선박 수, 투자와 이윤, 화물의 무게와 재화의 수량과 같이 숫자들만이 떠도는 성공신화의 예찬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판헬더르씨의 관점은 완전히 다르다. “100만명이 갔다?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이 갔을까?”라는 단순한 물음에서부터 선원들의 일대기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는 “벨테브레이나 하멜과 같은 청년들은 자신들의 눈앞에서 극명하게 삶의 희비가 교차하는 것을 목격했고, 한숨과 탄식, 그리고 기대가 섞인 감정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며 “이 같은 삶의 애환들은 회사의 규모나 실적을 나타내는 숫자만 보고서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영국의 국립문서보관소에는 영국 해군에게 포획된 네덜란드의 상선에서 발견된 4만여 통의 편지가 보관되어 있다.
“역사가들은 늘 한발 늦습니다”라고 고백하며, 무명의 선원들이 남긴 말과 글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이쪽 분야를 연구한 지 한참 후에서야 찾아왔다고 밝혔다.

스위스의 상트 갈렌 도서관에서 우연히 독일인 동인도회사 직원 요르크 프란츠 뮐러의 자필 원고와 드로잉들을 발견하면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값비싼 가죽 바인딩을 한 이 자필본을 열어보면 뮐러 자신이 그린 자화상이 바로 등장한다. 펼쳐진 노트와 함께 펜과 잉크가 놓인 책상 앞에 선 뮐러는 손가락으로 자신이 머물렀던 아시아 곳곳의 지도를 가리키고 있다. 지도를 들고 있는 큐피드는 명예와 영광을 상징하는 월계관을 그의 머리 위에 씌워주려 하고 있다. 20세기를 사는 우리의 상상 속에서 탄생한 사이보그의 모습을 한 벨테브레이의 동상과는 전혀 다른 진지함과 근엄함을 스스로 연출했다. 여백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쓰여 있다. “바다와 땅에 입혀진 신의 은혜가 있었기에/ 많은 진귀한 물건들을 보고, 명예도 추구하였다/ 재물과 돈을 위해/ 세상의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여행하였다/ 그 세상으로 인도해준 나의 창조주에게 감사한다.” 인생의 큰 관문을 지나고, 이윽고 자신이 걸어온 길을 성공적으로 평가하는 안도감마저도 느껴진다.

그러나 이런 해피엔딩을 암시하는 글은 그가 만난 숱한 이야기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예를 들면 2005년부터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는 동인도회사를 거쳐간 삶들이 남긴 방대한 수장고의 빗장을 여는 일과 같았다. 영국과의 분쟁을 있을 때마다 포획되었던 네덜란드의 배에는 선원들과 그의 가족들 간의 유일한 연락망이었던 많은 편지들이 실려 있었다. 그러나 끝내 배달되지 못한 4만여 통의 편지들은 현재 런던의 국립문서보관소에 보관되어 있다. 이 서간문의 존재를 확인한 판헬더르씨는 이후 수취인에게 전달되지 못한 편지를 하나씩 복원하여 역사적인 해석을 더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가 가장 통감한 내용은 남편이 아시아로 떠난 이후 남겨진 가족을 부양해야 했던 여인들의 사회적인 지위와 각박한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투쟁이었다. 막막한 생활고를 해결해보기 위해 친척들에게 가서 돈을 빌려왔다는 내용을 담거나, 더 급박한 상황에서는 집안 살림을 다 처분하고 집을 팔았다는 가슴 아픈 소식을 쓰기도 했다. 거대한 자본의 형성과 영광스러운 역사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등장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이야기들이다. 그가 벨테브레이와 하멜의 이야기를 시작하며 선원이 되고자 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러시안룰렛과 같은 삶을 선택했다고 비유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하멜이 남긴 글은 ‘1653년 바타비아발 타이완행 스페르버르호의 불행한 항해일지’라는 문구로 시작하는 긴 원제를 가지고 있다. 무릇 조선과의 인연만을 중시한 관점을 가지고 이 사료를 취급하기에는 너무 많은 이야기들이 묻혀 버릴 수 있다. 생사를 같이 했던 모든 승선인들, 그리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을 가족들의 상황을 종합적으로 그려볼 필요가 있다. 벨테브레이와 하멜이 남긴 말과 글은 그렇게 큰 그림 속에서 읽혀야만 한다.

양정윤 미술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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