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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만이 나전칠기 살리는 길… 외국인이 먼저 가치 알아줘”

입력 : 2014-08-18 20:40:55 수정 : 2014-08-19 00:3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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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완식이 만난 사람] 증권맨서 나전칠기 명장으로 변신한 김영준씨 작업복이 땀에 흥건하다. 그가 얼른 샤워실로 뛰어 들어간다. 바람 한점 없는 공간에서 사투를 벌이다 뭔가에 들킨 양 황급한 모습이다. 그 모양새론 손님을 맞기에 거북했을 것이다. 얼마나 흘렀을까. 그가 말끔히 옷을 갈아입고 나타났다. 왜 이런 짓을 하는지 자신이 바보스럽다며 손을 내밀었다. 얼굴엔 허허로운 웃음이 스쳤다. 나전칠기 명장 김영준(55)씨다.

작업실 한켠에 커다란 의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문양이 예사롭지 않은 의자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18일 서울 명동성당 미사를 집전할 때 사용한 의자다. 포천 작업실을 찾은 날 때마침 마무리 작업을 끝내고 명동성당으로 보내질 참이었다. 처음엔 교황 문장을 등받이에 세팅했다. 하지만 퇴짜를 맞았다. 성당 측에서 너무 화려하다며 난색을 표했다. 다시 가져다 교황 문장을 등받이 뒷면으로 하는 보완 작업을 할 수밖에 없었다. 교황의 성품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작업과정을 통해서 낮은 곳을 품는 ‘섬기는 권위’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됐습니다. 창작의 에너지인 가난한 마음도 그런 것일 겁니다. 인간에 대한 연민, 바로 순수를 일깨우는 울림이지요.”

김영준씨가 옻칠과 나전작업을 한 교황 의자. 그는 “돈을 좇아 작업을 한다는 것은 결국 위선에 이를 수 밖에 없다”며 교황이 “부자로 사는 수도자는 위선에 이르게 된다”고 한 경고가 남의 일 같지 않다고 말했다.
그가 교황의자 작업에 참여하게 된 것은 연천에 위치한 ‘화요일아침예술학교’ 교장인 홍문택 신부와의 인연에서 비롯됐다. 사제를 털어 미술에 자질이 있는 저소득층 여학생을 대상으로 대안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홍 신부에 감화를 받았다. 그는 재능기부 차원에서 자원교사로 나섰다. 홍 신부가 교황의자 작업을 주관하면서 자연스럽게 합류가 됐다. 그는 한국 전통 기법의 옻칠 작업을 담당했다. 나전으로 교황 문장도 꾸몄다.

그는 잘나가는 증권맨이었다. 주식투자 관련 책도 두 권이나 출간했다. 주식 바람에 방송에도 자주 불려다녔다. 강남 아줌마들은 주식컨설팅을 받기 위해서 그를 졸졸 좇아 다녔다.

“어느 순간부터 제 자신이 돈만 좇는 기계가 돼버린 느낌이 들었어요. 이래 살아도 돼나 반성적 사고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지요. 한 번뿐인 삶을 돈의 노예가 돼 허비해 버린다는 것이 아깝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한참 ‘인생이모작’ 열풍이 불던 시절이다. 회사도 부침을 거듭하면서 많은 이들이 소모품으로 내동댕이쳐졌다. 그는 결단을 했다. 나중에 버림을 당하느니 인생의 스케치를 스스로 그려보자고. 그는 과감히 사표를 던졌다.

“소모품처럼 대치될 수 없는 저만의 가치를 발현할 수 있는 걸 찾았습니다. 우연히 나전칠기 분야를 접하면서 이거다 싶었지요.”

그의 선택의 이유는 분명했다. 나전칠기 분야에서 모두가 떠나가고 있는 분위기가 그를 사로잡았다. 사람들은 미친짓이라 했다.

“주식투자도 남이 팔 때 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남이 가는 반대 방향에 ‘꽃길’이 있다는 주식격언도 있지요.”

몇 년에 걸쳐 작업한 나전칠기 달항아리. 정교한 작업이 요구돼 10억원을 호가한다.
그는 장인들과 함께 작업하면서 전통을 익혀 나갔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뭔가를 내것으로 만들어 간다는 희열이 있었다. 중고 시절 미대 진학을 권했던 선생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그의 예술적 끼를 알아봐 주신 분들이다.

“그림을 잘 그렸지만 시골에서 미대 진학은 언감생심이었지요. 밥벌이 취직이 급선무이던 시절이라 감히 부모님께 말도 꺼내보지 못했지요.”

그는 스스로 자신의 예술적 안목에 놀라기도 한다. 타고난 ‘팔자’를 되찾았다는 기쁨마저 든다. 그가 작업실과 이웃해 있는 창고로 안내했다. 우리가 한때 일상용품으로 썼던 골동들이 가득하다. 그것도 모자라 컨테이너박스까지 동원했다. 손때가 묻은 목가구들에선 세월이 느껴진다.

“끌리는 데 수집을 안 하고는 못 배겨 나지요. 한때는 박물관을 생각했는데, 다 부질없는 것 같아 뜻이 있는 곳에 기증할 생각입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나전칠기 분야의 현실을 잘 안다. 젊은 친구들은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다고 벌써 대부분 떠났다. 설상가상으로 싸구려만 판치니 생존 자체가 점점 불가능해지고 있다. “‘싸게! 싸게! 빨리! 빨리!’ 문화가 고급 전통문화를 사그라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옻칠이 아닌 카슈칠(카본도장)이 판을 치면서 불신만 키워 악순환의 고리를 만들고 있습니다.”

그는 명품의 길만이 나전칠기를 살리는 길이라 했다. 일부 안목 있는 이들이 웰빙 실내인테리어로 활용하고 있는 것도 고무적인 일이다. 옻은 먹을 수도 있는 웰빙 재료라는 점에서도 옻칠식기 등은 이미 고급 용기로 각광을 받고 있다.

“이제 우리도 제 값을 주고 전통의 명품을 소비하는 문화가 진작될 시점이라고 봅니다. 나전과 칠기로 꾸며지는 인테리어호텔 등도 앞으론 경쟁의 키워드로 등장하게 될 겁니다.”

그는 일찍부터 ‘명품 나전칠기’ 전략 차원에서 해외로 눈을 돌렸다. 디자인 개발을 위해 그는 미국과 이탈리아로 건너가 디자인 아카데미를 다니면서도 현지 디자인 기업에서 일을 하기도 했다. 현대적 디자인을 나전칠기에 접목해 나가기 위해서다. 이런 그의 노력은 화답으로 돌아왔다. 빌 게이츠가 VIP 선물용으로 나전칠기 ‘엑스박스’를 주문한 게 기폭제가 돼 유명 화장품의 고급 용기함 등의 제작 의뢰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최근엔 세계적 주류회사가 새로 선보이는 상품의 론칭 기념으로 주류함을 한정판으로 제작해 갔다.

“나전칠기의 명품적 가치에 외국인들이 먼저 눈을 떠가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되고 있습니다. 명품 전략이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이지요.”

그는 올 하반기 해외전시가 줄을 잇고 있다. 오래전부터 나전칠기의 진면목에 대해 공감하고 지지자가 되어준 한국미술센터 이일영 관장이 추진하는 전시다. 오는 10월 홍콩 바이어박람회를 시작으로 11월엔 말레이시아 셸오일 회장이 후원하는 전시가 말레이시아 관광청 전시실에서 열린다. 12월엔 상하이 아트페어에 작품을 출품할 예정이다.

그가 몇년에 걸쳐 완성한 대형 달항아리 나전칠기 작품을 꺼내 보였다. 10억원 이상을 호가하는 작품이다. 해외 전시에 출품될 작품이다. 자개를 0.1㎜ 크기로 잘라 곡면에 무늬에 맞게 붙여 나가는 작업은 시간과 인내, 고난도의 집중이 요구되는 작업이다. 평면에 작업을 해도 눈의 집중이 좀처럼 쉽지 않다. 옻칠도 마르면 다시 바르는 식으로 20여 번은 반복해서 쌓아갔다.

“제 생전에 두 번 다시 할 수 없는 작업입니다. 이런 종류의 작업은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는 아파트문화에서 나전칠기 가구의 퇴출을 아쉬워한다. 방충과 습도 유지 등 나전칠기 가구만큼 웰빙적인 가구가 없기 때문이다.

“검정 바탕이 아파트문화에 어울리지 못했어요. 창호 등의 변화에도 둔감했던 것이 초래한 결과지요.”

그가 다양한 바탕색과 디자인을 나전칠기에 접목하는 이유다. 한지 바탕도 도입하면서 회화적 느낌이 들 정도다. 나름의 나전칠기 회화까지 선보이기도 했다. 순수회화를 하는 이들은 그로부터 많은 재료적 상상력을 얻어가고 있다.

“중국은 옻칠그림에 앞서 있고 일본은 산업화 된 옻칠이 두각을 보이고 있습니다. 저는 중국과 일본의 장점들을 나전칠기에 적극 융합해 나갈 겁니다.”

이화여대 디자인대학원에서 후학들을 가르치고 있는 그가 전복, 진주, 소라 껍데기를 손수 다듬는다. 최근 들어서 인도, 베트남, 중국, 필리핀 등에서 가공되어 들어오지만 마음에 드는 색을 얻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 하나하나 자개를 색상별로 분류하는 작업은 수도자에 가까운 경지다. 미묘한 차이를 간파해 내기 위해선 욕심마저 버려야 한다. 사람들이 방한한 교황의 얼굴에서 진실을 보았듯이 그에게서 나전칠기의 진실을 보았다.

편완식 미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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