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제자 목소리가 얼굴… 앞 안보여도 이름 다 알아요"

관련이슈 차 한잔 나누며

입력 : 2014-08-29 20:14:08 수정 : 2014-08-29 22:32:29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차 한잔 나누며] 경북여고 시각장애 영어쌤 이우호씨 “쌤(선생님), 오른쪽요. 아니 아니, 좀 더 위에요. 스토∼옵!” 그러면 밑줄이 쳐지거나 중요 표시가 추가된다.

대구시 남산동 경북여고 1학년 수업시간 풍경이다. 이우호(40) 교사의 팔이 학생들 ‘주문’에 따라 분주히 움직인다. 영어 문장이 가득 쓰인 넓은 칠판 위를 종횡무진 누비던 분필은 학생들이 일제히 스톱 하면 멈춰 선다. 이 교사는 여기다 능숙하게 ‘밑줄 쫙’을 표시한다.

“오케이, 생큐! 자 이 부분 중요하니까 잘 봐두고….”

이우호 교사는 칠판 판서는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이 쓴 칠판 위의 글을 다시 찾지는 못한다. 그는 양쪽 눈이 모두 보이지 않는 1급 시각장애인이다. 이 때문에 ‘밑줄 쫙’이나 ‘당구장 표시 두 개’, ‘별표 다섯 개’ 등을 해야 할 때는 학생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 학생들은 이런 이 교사에게 영화 아바타(Avatar)에서 따온 ‘아바타 쌤’이라는 애칭을 붙였다. 

시각장애라는 역경을 딛고 대구 소재 경북여고에서 영어교사로 일하고 있는 이우호 교사가 인터뷰 도중 환하게 웃고 있다.
대구=이정우 기자
“영화를 보지는 못했지만 주인공이 외계 종족 아바타를 조종하는 내용이라면서요? 수업 시간에 한 번씩 학생들이 저를 조종하니까 그렇게 붙였나 봐요. 참 순수하고 귀여운 발상이죠?”

이 교사는 이 별명이 마음에 든단다. 영화 아바타에서처럼 어떤 매개체로 아이들과 직접적으로 소통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다.

지난해 이 학교로 첫 발령을 받아 최근 네 번째 학기를 맞은 이 교사의 수업은 왠지 특별해 보이면서 흥미롭기도 하다.

점자책을 상상했던 것과 달리 각종 디지털 장비가 잔뜩 동원된다. 먼저 교탁 위에는 교과서나 수업교재 대신 노트북이 올라가 있다. 이 교사는 노트북과 연결된 이어폰을 한쪽 귀에 꽂는다. 노트북 화면에는 영어 교과서를 텍스트로 옮겨 놓은 한글 파일이 열려 있다. ‘센스리더’라는 활자를 음성으로 출력해주는 프로그램을 이용해 교재의 내용을 귀로 들으면서 수업을 진행한다. 교실 한귀퉁이에 있는 대형 TV에는 프레젠테이션도 등장한다. 이 교사가 보조교사와 함께 미리 준비해온 예문, 문장 구조 등이 적힌 수업 자료다. 리모컨을 이용해 페이지를 넘기면 학생들이 따라 읽는 식이다.

그가 아직 서툰 부분을 돕기 위해 ‘도우미’를 자처한 학생들이 반마다 2명씩 배정돼 있다는 점도 재미있다. 이들은 칠판 밑을 더듬는 이 교사의 손에 분필을 쥐여주거나 영문장으로 꽉 차 있는 칠판을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닦기도 한다. 그를 위해 학생들은 앞다퉈 자신의 팔을 내민다. 자연스레 학생들도 수업 진행에 함께 참여하는 셈이다.

“일종의 참여식 수업이라고도 할 수 있죠. 저 혼자는 수업을 진행할 수 없고, 이러다 보니 학생들도 제게 집중하지 않을 수가 없죠. 장애인 교사여서 학생들이 수업에 더 집중할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어요.”

이 교사의 시력이 나빠지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쯤이다. 당시엔 단순히 원시 판정을 받았다. 차츰 시력이 나빠지는 것을 느꼈지만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군 입대를 앞둔 스무 살 무렵 신체검사를 받던 중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시련의 이름은 ‘망막색소변성증’이다. 안구의 가장 안쪽 신경 조직인 망막의 세포가 변성하거나 퇴화하다 결국 시력을 잃는 질환이다. 아직 명확한 원인도 치료 방법도 나오지 않았다. 이후 그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빛은 점점 사라졌고 스물네 살 때는 모든 세상이 암흑천지로 변했다.

“제 시각의 시간이 멈춘 거죠. 아직 제가 기억하고 있는 부모님과 누나, 동생들의 모습은 지금보다 젊었을 그때의 모습이 전부죠. 시각장애인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참 힘들었어요.”

이후 방황했지만 곧 스스로 마음을 다잡아 일어섰다. 시각장애인으로서 삶을 하나씩 준비해갔다. 대구 광명학교에서 재활을 거치던 중 그는 교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특히 고교 시절부터 좋아했던 영어는 누구보다 잘하고 잘 가르칠 자신이 있었다. 재활을 마쳐가던 때쯤인 2001년 그는 대구대 영어교육과에 입학해 교사가 되기 위한 학업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또 5전6기의 도전 끝에 2012년 중등임용고시에 당당히 합격했다. 시련은 그저 그가 넘어야 할 대상이지 그 이상은 아니었다.

이제 다음 수업을 준비해야 한다는 그와 학교 복도를 함께 걸었다. 이 교사는 복도에서 인사를 해오는 학생들의 목소리만 듣고도 예지인지, 민주인지, 승은인지를 척척 가려냈다.

“다들 너무 예쁘고 착하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입니다. 아직 (이름을) 다 외우진 못했어요. 지난해 가르쳤던 학생은 90∼95% 정도 기억하는 것 같아요. 비슷한 목소리도 많고 가끔은 이름이 헷갈리기도 하거든요.”

문득 그렇게 사랑스러운 학생들을 보고 싶지는 않은지 물었다.

“전 이미 보고 있어요. 단지 저만의 방식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은 제가 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지만요. 바로 마음으로 보는 겁니다.”

글·사진 대구=이정우 기자 woolee@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비웨이브 아인 '미소 천사'
  • 비웨이브 아인 '미소 천사'
  • 비웨이브 제나 '깜찍하게'
  • 정은지 '해맑은 미소'
  • 에스파 카리나 '여신 미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