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단종의 후견인 좌의정 김종서를 철퇴로 죽인 수양대군은 경복궁을 장악하고는 왕명을 빙자해 대신들을 입궐시켰다. 살생부에 따라 공조판서 정인지, 참판 이계전은 살아남았고 단종을 보호하던 영의정 황보인, 좌찬성 이양, 우찬성 조극관 등은 죽었다. “그만”이라는 말을 한 황보인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정권의 주인이 바뀌는 정치격변기나 선거의 계절이 되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게 살생부다. 고대 로마제국에선 살생부가 정적 숙청의 수단으로 쓰였다. 기원전 82년 개혁파와의 권력투쟁에서 이긴 원로원파의 독재관 술라는 ‘국가의 적’이라는 이름으로 반대파 1600여명의 명단을 포룸 로마눔 광장에 내걸었다. 살생부에 오른 정적을 죽이면 상금까지 주었다니 이런 비정한 정치도 없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2002년 서울시장에 당선된 직후에도 ‘서울시 공무원 살생부’ 논란이 있었다. 이 전 대통령은 당시 한 참모가 선거운동을 돕지 않은 시 공무원 명단을 들고 오자 보지도 않은 채 호통을 치며 “없애버려라”고 했다고 2005년 밝힌 바 있다. 2002년 노무현 대통령 당선 직후에도 민주당 의원들을 대선 기여도에 따라 특1등과 1∼3등의 공신, 역적, 역적 중의 역적으로 분류한 살생부가 당을 강타한 적이 있다.
새정치민주연합 중도파 의원 15명이 만든 장외투쟁 반대 연판장이 정치권에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이들은 강경파에게 미운털이 박혔을 터이다. 강경파가 당권을 틀어쥐면 서명파 명단이 자칫 살생부가 될 수 있다는 얘기까지 나돈다. 그러나 서명파는 다수 국민의 박수를 받았다. 민심을 제대로 읽은 정치인이 사랑을 받는 건 당연지사다. 혹여 강경파가 서명파 손보기에 나선다면 국민이 만든 살생부에 이름이 오를 각오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김환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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