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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답사 발길 이어지는 부여 성흥산성·대조사

입력 : 2014-09-11 19:16:39 수정 : 2014-09-11 23:4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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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사비 천도 앞두고 지은 천년산성
가파른 계단 오르면 수령 400년 장대한 느티나무
탁 트인 배경에 아름다운 일몰 풍경 유명
황금새 전설 담은 대조사엔 거대한 불상 있어
옛 백제의 수도 부여는 경주 다음으로 손꼽히는 답사 여행지다. 한낮 햇볕의 기세가 누그러져 걷기가 한결 수월해지는 가을이 되면 부여에는 수많은 답사객의 발길이 이어진다.

부여 여행을 계획한다면 대개는 낙화암과 부소산성, 정림사지, 궁남지 등 옛 사비성 안쪽의 유적을 떠올린다. 예전에 수학여행이나 답사를 다녀온 중장년층이 기억하는 부여의 명소도 대부분 이곳들이다. 그러나 지금의 부여읍을 감싸고 있던 옛 사비성 밖에도 숱한 유적과 유물이 남아 있다. 그래서 사비성 안쪽의 유적만을 둘러본다면 백제의 절반, 부여의 절반밖에 보지 못하는 것이다.

사비성 밖에서 가장 먼저 가볼 곳은 임천면의 성흥산성과 대조사다. 두 곳은 웅진(공주)시대에서 사비(부여)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 백제의 움직임을 엿볼 수 있는 유적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 동성왕은 사비로 세 차례 사냥을 나갔다. 이때 웅진 도성에서는 괴이한 일이 잇따랐다. 동성왕이 부여로 사냥을 간 것을 두고 후대 사가들은 ‘부여로의 천도를 모색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동성왕은 부여 땅에 성흥산성(당시 가림성)을 쌓고 위사좌평인 백가를 성주로 내려보냈으나, 지방 전출에 불만을 품은 백가는 동성왕을 살해하고 만다. 결국 백제는 동성왕 이후 무령왕을 거쳐 성왕 때 사비로 도읍을 옮긴다.

부여 옛 사비성 바깥의 유적으로 손꼽히는 게 성흥산성이다. 웅진시대에서 사비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 백제의 자취가 이곳에 남아 있다. 산성 위에는 수령 400년쯤 되는 느티나무가 옛 백제 땅을 굽어보며 늠름하게 서 있다.
성흥산은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전망대이기도 하다. 해발고도가 250에 불과하지만 이곳에 오르면 옛 백제 땅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가파른 돌계단을 거쳐 산성에 오르면 장대한 느티나무가 먼저 눈길을 끈다. 수령이 400년쯤 됐으니 백제의 역사와는 비견할 수 없는 나이지만, 보기 드물게 늠름하고 잘생겼다. 우람한 이 나무둥치와 그 아래 옛 백제 땅이 어우러지는 풍경은 그야말로 일품이다. 성흥산성은 가급적 해질녘에 찾는 게 좋다. 맑은 날 붉은 노을이 반원 형태의 느티나무 가지 아래 걸리는 이색적인 해넘이를 만날 수 있다.

성흥산성 바로 아래 자리한 대조사의 석조미륵보살 입상.
성흥산성 바로 아래 자리한 대조사(大鳥寺)에는 이름 그대로 커다란 황금새의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노승이 이곳의 큰 바위 아래서 참선 중 잠이 들었다가 꿈속에서 황금새 한 마리가 날갯짓을 하는 모습을 봤다고 했다. 이 얘기를 들은 성왕은 ‘사비 천도의 시기가 왔다’고 판단해 이곳에 대사찰을 짓도록 했다. 그 바위가 불상으로 변했다는 전설도 내려오지만, 현재 남아 있는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제217호)은 고려시대 불상이다. 15년 전쯤 이 미륵보살 앞에 용화보전을 세웠는데, 전면에 투명유리를 들여 실내에서도 미륵보살을 향해 예불을 드릴 수 있도록 했다.

백제왕릉원으로 불리는 능산리 고분군은 백제 왕이나 왕족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사비성 외성 동쪽 바깥에 자리한 곳으로, 고분군과 외성 사이에는 절터가 있다. 왕릉 옆에 세운 절을 ‘능사’라고 부르는데, 이 절터는 지명을 빌려 ‘능산리사지’라고도 불린다. 이곳에서 1993년 백제 문화재 중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금동대향로가 출토됐다.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금동대향로가 160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완벽한 형태로 발견된 것은 공주 무령왕릉 발굴에 버금가는 고고학적 대사건이었다.

부여 능산리 고분군.
1995년 목탑터에서 발견된 사리감에 새겨진 글귀를 통해 이 능사는 백제 창왕이 아버지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은 것임이 확인된다. 성왕은 관산성에서 신라군에게 포위당한 아들 여창(훗날 창왕)을 지원하러 가다 매복 중인 신라군에게 목숨을 잃었다. 창왕은 참담한 심정으로 아버지 능 옆에 절을 짓고 금동대향로에 향불을 피웠을 것이다. 이 능산리고분에는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왕의 가묘도 조성돼 있다. 이 가묘가 만들어진 게 2000년이니, 의자왕은 당나라로 끌려가 숨을 거둔지 1400년이 지나서야 고향 땅으로 돌아온 셈이다.

부여=글·사진 박창억 기자 daniel@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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