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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론, '과학'인가…강자 위한 '정치논리'인가

입력 : 2014-09-26 16:37:38 수정 : 2014-09-26 16:3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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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스 앤 넌센스/케빈 랠런드·길리언 브라운 지음/양병찬 옮김/동아시아/1만9000원
2006년 ‘서울 속의 파리’로 불리는 서초구 서래마을에서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다. 어느 프랑스인 부부의 집에서 영아 시신 2구가 발견된 것이다. 경찰은 영아를 낳은 어머니로 추정되는 여성을 범인으로 지목했으나, 해당 피의자는 “내 아이가 아니다”며 혐의를 극구 부인했다. 하지만 한국을 떠나 프랑스로 돌아간 여성은 결국 현지 경찰에 자수했다. 그녀는 “원치 않는 아이를 낳았기 때문에 살해한 것”이라고 고백해 전 세계에 충격을 안겼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함함하다고 한다”라는 속담을 철석같이 믿는 한국인들 눈에 영아살해는 패륜적이고 엽기적인 범죄의 극치일 뿐이다. 그런데, 진화론을 동원하면 영아살해는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려는 인간의 노력에서 비롯한 산물로 얼마든지 설명이 가능하다.

일례로 문화인류학자들이 남미 파라과이의 한 원시 부족을 연구한 결과 신생아의 5%가 생후 첫 해 부모에 의해 목숨을 잃은 것으로 드러났다. 학자들은 재혼을 앞둔 여성이 새 남편과의 관계 때문에 영아를 제거하거나, 남편이 출산 직후 사망한 아내의 시신과 함께 영아를 땅에 묻어버린 경우가 많음을 밝혀냈다. 새 배우자와의 결합, 그리고 가정의 붕괴는 둘 다 인간의 생존 환경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는 변화다. 영아살해는 이 변화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개발된 일종의 수단이라고 진화론은 설명한다.

진화론의 아버지 찰스 다윈. 다윈은 인간을 이해하는 한 방식으로 진화론을 개척했으나, 후대 학자들은 강자의 지배를 뒷받침하는 논리로 진화론을 악용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과거 ‘자녀 하나만 낳기’ 캠페인이 엄격했던 중국에서는 아들을 원하는 부부가 딸을 낳으면 살해해 야산에 암매장하는 사건이 빈번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중국 농촌은 남아 선호 사상이 아주 강하다. 대를 이어 농사를 짓고 부모를 봉양할 아들이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 딸을 낳으면 더 이상 아들의 출산이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사람들이 동원한 방식은 갓 태어난 여아를 없애는 것이었다.

이처럼 진화론은 인간의 모든 행동을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미화하는 경향이 있다. 진화론에 의하면 영아살해 같은 범죄, 강대국에 의한 식민통치, 심지어 1·2차 세계대전처럼 참혹한 전쟁까지도 합리화된다. 과연 진화론은 ‘강자의 지배를 뒷받침하는 논리’에 불과한 걸까.

2006년 8월 서래마을 영아살해 사건 피의자로 지목된 프랑스인 여성이 기자회견에서 입장을 밝히고 있다. 처음엔 무죄를 항변했던 여성은 결국 범행을 시인해 충격을 안겼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진화론의 아버지 찰스 다윈(1809∼1882)의 후예인 영국인 학자 두 명이 쓴 ‘센스 앤 넌센스’는 진화론에 관한 20세기 최고의 교과서로 불린다. 책은 다윈의 이론이 후대 학자들에 의해 심각하게 오염됐다고 주장한다. 저자들에 따르면 진화론자를 자처한 장 라마르크, 프랜시스 골턴, 허버트 스펜서 등은 진화론을 오해하고 악용한 대표적 사례다. 그들이 진화론을 토대로 개척한 우생학과 사회진화론은 ‘월등한 유전자만 살아남는다’, ‘사회가 진화하면서 야만적 사회와 문명사회로 나뉜다’ 등 허무맹랑한 주장을 마구 펼쳤다. 2차 대전 당시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자행한 유대인 학살은 그 정점을 찍었다.

저자들은 진화론을 둘러싼 다양한 담론들 속에서 ‘진짜 과학’과 허무맹랑한 ‘얼치기 과학’을 철저히 구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다윈이 처음 진화론을 설파했을 때의 원래 의도에 충실해야 한다는 뜻이다. 책은 진화론에 관한 여러 견해들 사이에서 중도적 입장을 취하며 ‘인간을 이해하는 의미있는 방식’으로서 진화론의 진면목을 파헤친다. 또 20세기 진화론의 대표적 갈래인 사회생물학, 인간행동생태학, 진화심리학, 문화진화론 등의 주요 개념도 풍부한 사례와 함께 소개한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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