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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세 현역 번역가 김욱, 노재(老才)의 시대를 열다

입력 : 2014-09-29 17:46:08 수정 : 2014-09-29 17:4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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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청춘 삶 담은 ‘가슴이 뛰는 한 나이는 없다’ 출간
“끝나기 전에는 끝난 게 아니다” “뇌는 늙지 않는다” 울림
고달픈 청춘과 쉬고 싶은 중년들에게 자기 자신을 발휘하라고 외치는 김욱 선생. 그는 나이듦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모든 이에게 노화가 아니라 진화하는 것이라고 조언한다.
그대가 85세라면,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아니, 75세라면 뭔가를 시작할 수 있을까. 쉽지 않을 것이다. 몸이 말을 듣지 않기 시작한 인생 황혼녘에 뭔가를 새롭게 시작한다는 게 결코 녹록지 않을 것이다.

여기 그런 사람이 있다. 85세 현역 번역가 김욱(본명 김호식)씨다. 스스로를 ‘적추(赤秋·붉은 가을)’라고 부르며 노인청춘시대를 살고 있다. 물질과 출세 같은 세상 속박에서 벗어나 이제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고 외친다.

그는 30년간 기자로 일해오면서 우리 시대의 평범한 가장들이 그러하듯이 앞만 보고 달려오느라 바쁜 삶을 살아왔다. 일과 인간관계, 가족 부양과 아파트 평수 늘리는 재미로 어려서부터의 제 꿈이 작가였음은 염두에조차 두지 못했다. 그저 꿈이 있다면 은퇴 후에는 한갓진 전원주택에서 글이나 끼적이며 쉬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나 일흔을 앞두고 잘못 선 보증으로 쫄딱 망해 전 재산을 날리고 그 울분으로 협심증까지 걸려 남의 집 묘막살이 신세로 전락한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간절함으로 도전한 것은 번역이었다. 김씨는 10년 동안 200권이 넘는 책을 번역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선보였으며, 여든다섯 오늘도 번역가이자 작가로서 노재의 시대를 열고 있다.

그는 110세까지 살고 싶다고 말한다. 아직도 25년이 더 남은 삶의 계획에 번역은 95세까지 하고, 은퇴 후에는 중국어를 배울 작정이다.

자신은 비록 노년에 이르러 알게 된 삶의 기쁨을 젊은이들과 나누고 싶고, 또 ‘늙어서 이젠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남은 생이 결코 짧지 않음을 공유하고, 누구나 죽을 때까지 가슴 뛰는 삶을 살고 그 기쁨을 나누고 싶어한다.

김씨는 최근 ‘가슴이 뛰는 한 나이는 없다-85세 현역 번역가 김욱, 노재의 시대를 열다’(도서출판 리수)를 펴냈다. 인생 후배들에게 들려주는 ‘노년에 맞이한 격렬했던 성장통의 의미’와 ‘진정한 내 삶을 찾아가는 용기와 희열’을 담은 책이다.

열다섯에 작가를 꿈꿨던 저자는 일흔이 넘은 나이에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첫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지금의 그로서는 꿈을 잊었던 50여 년이 유감이다. 물론 최선을 다해 바쁘게 살아왔지만, 사회적 운명이 쥐고 흔든 삶은 나 자신을 잊게 했고, 은퇴 후에는 모든 걸 훌훌 털어버리고 쉬고만 싶은 무기력한 삶을 꿈꾸게 하였다. 지금도 사회적 운명에 자신의 삶을 맡긴 채 바쁘게 사는 우리에게 그는 인생의 선발대로서 조언한다.

“내 삶의 주체를 사회적 운명에 넘기지 말고 나 자신이 틀어쥐어라. 그리고 자신을 발휘하는 삶을 살아라. 그것이 진정한 삶이고 행복이다.”

옛 사람들은 오로지 입신양명을 위해 청춘을 바쳤다. 그러다가 나이 들어 힘에 부치면 조정에서 물러나 한적한 고향으로 내려갔다. 말년에 노비들에 둘러싸여 호사나 누리려는 게 아니다. 드디어 돈과 명예와 가문과 가족 건사라는 속박에서 풀려나 단 하루라도 나를 위해, 내가 원하는 삶을 누리겠다는 의지에서였다. 퇴물 양반이 하릴없이 방구석에서 처박혀 붓질이나 하는 것처럼 보였던 것들은 놀라운 ‘작품’이 되었다. 구속 없이 내가 하고 싶은 일, 참된 꿈을 실현한 결과다. 어찌 보면 예나 지금이나 이순(耳順)에 달해야 비로소 먹고 사느라 밀쳐놨던 내 꿈을 펼쳐볼 기회가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요는 그 열망을 잊지 않는 자만이 기회를 얻게 된다는 점이다. 이것이 일흔 넘어 자신의 꿈을 맛본 김욱이 인생 후배들에게 전하고픈 꿀단지이다.

분명 나이가 들면 육체의 쇠락이 찾아온다. 혈관봉합술로 1912년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한 알렉시스 카렐에 의하면 나이 들어 상실하게 되는 신체 능력은 30%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러나 이조차 단순한 노화로 치부하기는 어렵다. 나이 들수록 주름지는 것은 피부 표면의 수분이 증발하는 시간을 늦추기 위함이고, 몸에 안 좋은 자외선에 노출되는 면적을 줄이기 위함이다. 나이 들어 키가 줄어드는 것도 불필요한 골격을 줄여 소비되는 에너지를 절약하기 위함이다. 그렇게 절약된 에너지는 생명 유지 장치라고 할 수 있는 심장과 뇌에 우선적으로 공급된다.

인간은 겉으로 드러난 아름다움을 버리고 더욱 완벽한 생명체로 탈바꿈하고자 영리하게도 노화라고 부르는 과정을 선택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노화(老化)라는 말은 틀린 표현이다. 진화(進化)가 맞다.

이렇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노화의 과정을 겪지만, 우리 몸 중에서 노화를 겪지 않는 유일한 장기가 있다. 바로 ‘뇌’다. 이렇게 뇌가 멀쩡하게 남아 있는 까닭은 여전히 해야 할 일이 많기 때문이다. 이는 나이 들수록 위축되곤 하는 우리에게 마지막 임무를 전한다. 50대, 60대, 70대에 올림픽에 나가서 레슬링으로 금메달을 따기는 불가능하다. 빌딩을 짓고 댐을 짓는 건설가가 되기도 어렵다. 그러나 칸트를 읽고, 사서삼경을 읽고, 성경을 읽고, 가족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내가 살아온 이야기, 세상에 해주고 싶은 이야기를 글로 쓰는 등의 지적으로 충만한, 내적으로 행복한, 인간적으로 자랑스러운 노년의 지성미 넘치는 최후의 마무리는 누구든지 가능하다. 정신적인 생활에서 기쁨을 찾는 것, 이것이야말로 나이듦의 주종목인 것이다.

그는 여든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필력이 쇠퇴하지 않은 까닭에 대해 70대의 내가 20대 30대의 나만큼 고민하고 노력했기 때문이라고 잘라 말한다. 쟁쟁한 젊은 번역가들 속에서 굳건히 존재할 수 있었던 데에는 남다른 노력이 필요했다. 늙다리 냄새 풍기는 구투의 언문 흉내를 내지 않으려고 잘나가는 젊은 번역가들의 책을 숱하게 읽는 한편 워드프로세서를 배우고, 젊은이들이 알지 못하는 책, 그들이 번역할 수 없는 책을 찾아내서 틈새를 공략했다.

어린 시절부터 외우다시피 읽어왔던 수많은 명저 중 아직 출판되지 않았거나 오래전에 발간이 중단된 책들을 찾느라 경기도 포천에서 서초동 국립중앙도서관까지 왕복 세 시간 반을 길에 허비하며 찾아보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자기관리력 또한 철저하다. 새로운 인생을 준비하면서 찬 새벽이 올 때까지 술 마시며 낭비한 젊은 날이 아까워 새벽형 인간이 되기로 작심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낮 12시까지 책상에 붙들리는 생활로 전환하여 하루에 70매씩 번역에 임했다. 한 달이면 원고지 2000매다. 처음 번역 일을 시작했을 때 원고지 1매당 1500원을 받았으니 한 달 수입이 300만 원이었고, 지금은 1매당 3000원부터 시작하니 몸값이 두 배로 오른 셈이다.

이 모든 것은 인내와 근면의 산물이다. 세월은 속일 수 없으므로 젊은 자신을 따라가지는 못한다. 질을 따져 줄어든 능력에 실망하기보다는 이만큼이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에 ‘엉덩이는 무겁게, 손은 재빠르게’라는 말을 유념해온 결과이다.

그는 책 속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야구 명언 중에 ‘끝나기 전에는 끝난 게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인생과의 싸움은 끝이 없다. 그리고 패자도 없다. 내가 인생을 이겨버린다면 나는 승리자가 된다. 내가 인생에 패한다면 승리자는 나의 인생이 된다. 손해 볼 것 없는 이 싸움에서 꼬랑지를 말고 도망쳐 숨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조정진 기자 jjj@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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