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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사람의 말, 짐승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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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4-10-03 20:39:32 수정 : 2014-10-03 22:0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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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소통’ 목청 높여 외치는 사회
타인의 아픔과 고통 귀 열고 들어야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시력을 잃는다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생은 암담할 것이다. 헬렌 켈러는 생후 19개월에 시력과 청력을 잃었다. 도로시 허먼은 평전 ‘헬렌 켈러’에서 그렇게 심각한 장애는 보기 드문 것이라고, 20세기 이후 헬렌 켈러처럼 유아기에 시력과 청력을 모두 잃은 사람은 전 세계를 통틀어 50여명에 불과하다고 했다.

헬렌 켈러 이야기를 언제 처음 접했을까. 너무 오래전 일이라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고도 살 수 있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충격적이었고, ‘삼일만 볼 수 있다면’이라는 감동적인 글을 읽고 한동안 암송하고 다니던 기억은 생생하다.

살아가면서,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막막하고 암담한 순간에는 헬렌 켈러를 떠올렸다. 내가 아는 인간 조건 중에 그보다 더한 악조건은 없기 때문이다. 생후 19개월, 세상에 대한 어떤 지식도 경험도 쌓이지 않은 상황에서 눈이 보이지 않고 귀가 닫힌 것이다.

“나는 너무 어려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지 못했다. 잠에서 깨어나보니 모든 것이 깜깜하고 조용했다.” 헬렌 켈러의 회상이다.

요즘 들어 부쩍 헬렌 켈러가 떠오르는 날이 많다. 내가 처한 상황이 막막하고 암담해서만은 아니다. 눈이 멀고 귀가 닫힌 사람들의 세상을, 나 역시 눈멀고 귀먼 채 두 팔을 뻗어 더듬더듬 헤쳐나가는 느낌을 많이 받기 때문이다. 타인의 울음에 귀 막고, 타인의 아픔에 눈 돌린 채 살아가는 세상은 눈멀고 귀먼 사람들의 세상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생후 19개월에 시력과 청력을 잃은 헬렌은 일곱 살에 애니 설리번 선생을 만나기까지는 ‘난폭한 짐승’과 다르지 않았다. ‘친척들은 헬렌을 괴물로 여겼고, 정신장애가 있는 게 분명하니 보호시설에 보내는 게 좋겠다’고 헬렌의 어머니에게 충고할 정도였다. 눈이 보이지 않고 귀가 들리지 않으니 그러지 않겠는가. 자기가 무슨 짓을 해도 다른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볼 수도 들을 수도 없고,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괴로워하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하니 말이다.

지금 우리가 그러고 있지 않는가. 욕망과 무지에 눈이 멀고, 아집과 독선으로 귀를 닫은 채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모두가 ‘소통’을 목청 높여 외치는 사회는 모두가 목청 높여 ‘조용히 하자’고 외치는 초등학교 교실을 방불케 할 뿐이다. 아무도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이지는 않으면서 말이다.

누가 먼저 입을 닫고 귀를 열어야 할까.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어야 하지 않을까. 조금은 숨 쉴 만한 사람이 먼저 입을 닫고 귀를 열고 열린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이 든다. 아프고 슬프고 고통스러운 사람의 비명과 울음과 말이 우선이어야 한다는 생각. 

강태형 시인
왜냐면 의견과 주장은 조금 기다렸다가 해도 되지만, 비명과 울음은 참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때같은 어린 자식들이 죽어가는 것을 눈앞에서 지켜본 사람들의 비명과 울음을 우리는 제대로 귀를 열고 들어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아픔과 슬픔과 고통을 우리는 짐작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4월16일 이후 170여일이 됐다. 하지만 그날 이후 시간이 멈춰버린 사람들이 있다. 그날 그 자리에서 한 치도 움직일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수장되어버린 꿈들에게 우리는 말했다. 미안하다고, 잊지 않겠다고. 그것은 사람의 말이었다. 그 ‘사람의 말’은 하나도 실천되지 못했다. 그 ‘사람의 말’이 실천되지 못하고 이대로 묻힌다면 우리는 ‘난폭한 짐승’의 시간을 살아가게 될 것이고, 훗날 또 우리 중의 누군가가 아프고 슬프고 고통스러운 날을 맞게 될 것이다.

강태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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