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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진의청심청담] 문화주인 되는 길, 종교와 과학의 두 수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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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4-10-13 20:56:01 수정 : 2014-10-13 20:5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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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문화도 창조성 잃으면 소멸
문화능력 갖춰야 주인될 수 있어
한 문화가 ‘주인 되는 길’은 쉬운 일이 아니다. 혹자는 살면 저절로 주인이 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사람들의 살림살이가 그렇지 않다. 문화는 항상 흐르는 것이고 보면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문화가 옛날부터 우리의 것인 경우는 매우 드물다. 따지고 보면 외래에서 흘러들어온 것이 대부분이고 혹간 자생적인 경우가 있다.

한국음식의 대명사가 된 김치도 고추를 쓴 것이 임진왜란 이후라고 한다. 그 전에 김치는 백김치였다고 한다. 그 옛날부터 우리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의외로 다른 나라에서 들어온 것인 경우가 많다. 오늘날 한국종교의 대명사가 된 기독교, 불교도 실은 외래종교이다.

박정진 객원논설위원·문화평론가
그렇다면 문화의 주인이 되는 길은 무엇인가. 고유문화만을 고집하는 것이 주인이 되는 길도 아니고 그렇다고 외래문화를 유행만 따르는 것이 주인이 되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고유문화는 어떻게 창조적으로 보존하고, 외래문화는 어떻게 자신의 것으로 토착화하는가이다.

고유문화나 전통문화도 창조적으로 지키지 않으면 시대에 뒤떨어지고 사람들이 즐겨 쓸 수가 없게 되고, 사용빈도가 떨어지면 자연히 삶에서 멀어진다. 그래서 시대에 맞게 문화도 젊어져야 하는 것이다. 외래문화는 유행을 타는 것이지만 그것을 창조적으로 토착화하지 않으면 한동안 떠들썩하다가 어느덧 사라지게 된다.

문화의 주인이 되는 요체는 바로 시대에 맞게 창조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달려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창조경제를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창조적이지 않으면 결코 주인이 되지 못할 뿐 아니라 자신의 것도 잃어버리게 된다. 결국 시대에 맞게 하는 ‘시중(時中)’의 문제가 된다.

한국문화가 주인정신을 잃어버리게 된 것은 아마도 고려후기인 것 같다. 고려 중기까지만 하더라도 송나라가 두려워하고 배울 정도로 훌륭한 문화를 이루었다. 고려의 역사나 문화에 대해서 우리는 너무 모르고 있다. 조선조가 잘못 한 일 가운데 가장 큰 죄과는 고려사를 제대로 기술하지 못하고 잃어버린 점이다. 고려조는 그래도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남겨서 삼국시대의 문화를 알 수 있게 했는데 조선조는 그렇지 못했다.

세종(1449년)의 명에 의해 편찬을 시작하여 2년 반 만에 완성을 보고, 단종 2년(1454년)에 간행된 고려사는 김종서(金宗瑞)·정인지(鄭麟趾)·이선제(李先齊) 등의 관료에 의해 편찬되었지만 고려문화를 복원하기에는 자료가 부족하고, 왜곡된 경우가 많다고 한다. 세계적으로 빼어난 고려불화와 청자, 금속활자의 발명만 보아도 고려가 얼마나 훌륭한 문화를 구가했는가를 알 수 있다. 문화요소가 항상 전체의 수준과 동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송나라의 사신 서긍(徐兢, 1091∼1153)은 1123년 고려를 방문하여 몇 달 묵었을 뿐인데 40권 분량의 ‘고려도경’을 남겼다. 송나라의 문화난숙기를 구가했던 휘종의 명을 받고 고려 예종의 조의를 위해 들어온 그는 고려 시대의 정치, 사회, 문화, 경제, 군사, 예술, 기술, 복식, 풍속 등 문화를 총체적으로 다루었다. 물론 중국인의 시각에서 기술한 것이지만 고려문화의 총체성을 짐작하게 한다.

우리는 쉽게 조선조에 형성된 문숭상(文崇尙)의 사대주의적 시각에 의해 고려무신정권을 매도하지만 실은 고려는 송나라와도 대등한 교류를 하였으며, 세계제국 몽골을 상대로 수십 년간 전쟁을 벌이고 삼별초군은 제주도까지 가서 항전하여 자주성이 높았음을 짐작하게 한다.

대체로 문인들은 선진문물을 외국에서 배우고 도입하는 것이 문화의 당연한 이치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선진문물의 도입이 아니라 그것을 자기화하지 않고, 안이하게 사용만 하는 데에 있다. 선진문물을 도입하고 사용만 하면 자신도 모르게 길들여지고 나중에 창조력은 고갈되기 마련이다.

한국의 민족주의가 소국주의에 빠진 것은 바로 그러한 문화적 노예근성 때문이다. 세종과 성종조를 중심으로 강력한 문예부흥운동을 펼치던 조선은 후기에 들어 소중화주의를 통해 한국문화의 위선성과 노예근성을 적나라하게 표출했다. 소중화주의는 노예가 자신을 주인인 줄 착각한 것이다. 조선후기의 노론세력은 결국 조선을 일본의 식민지로 내주고 말았다.

선진외래문물은 재빨리 자기화하여 재창조하지 않으면 중독성이 심해서 그것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게 된다. 노론의 명나라 사대는 그러한 것의 대표적인 경우이다. 오늘날 문화교류에서도 심한 미국편중은 소중화주의의 우려가 되고 있다. 노론은 쉽게 욕하면서 미국편중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문화주인 되는 길을 너무 모르는 것이다. 문화능력이 있어야 주인이 될 수 있다. 아무리 주인이 되고 싶어도 문화능력이 없으면 그것을 실현할 수 없다. 역으로 문화능력이 있으면 주인이 되기 싫어도 실질적으로 주인이 되고 외국에서도 그렇게 대접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문화능력은 무엇을 말하는가. 문화능력은 문력(文力)과 무력(武力)의 총합이고, 이때 무력에는 물론 과학이 포함된다. 문력의 핵심은 철학과 역사의식, 종교와 예술이다. 결국 문화능력은 종교와 과학의 두 수레바퀴를 말한다. 문화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바로 자신의 두 수레를 가졌을 때를 말한다.

대체로 무력과 과학기술문명이 발달하면 인문적 문화예술과 종교도 함께 발달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근대의 서양철학이 과학문명의 발달과 더불어 그것을 일상 언어로 해석하기 위한 노력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르네상스의 화려했던 문화예술은 중세 기독교 교세의 영향에 힘입은 바가 크다. 문화예술도 경제적 파트론이 없으면 힘들다. 문화가 왜 하나의 총체인가를 짐작할 것이다.

박정진 객원논설위원·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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