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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신을 쪼아먹는 한 마리 검은새

입력 : 2014-10-16 20:13:09 수정 : 2014-10-16 20: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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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희 열두 번째 시집 ‘응’ “사막에서 시신을 쪼아 먹는 새를 본 후로는/ 세상의 모든 새들이 육친으로 보인다/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내 살과 피는 새의 눈처럼 날카롭고 의뭉하다/ 아무리 씻어도 죄 냄새가 난다/ 입술에 묻은 핏빛 슬픔과/ 검은 고독으로/ 시를 쓴다”(‘조장鳥葬’)

슬픔과 고독은 시의 깊은 우물이다. 언젠가는 “결국 흙의 이빨에 물어뜯기고 말” 죽음을 거느린 존재이기에 슬프고, 내가 스스로 나의 시신을 쪼아먹는 한 마리 검은 새여서 고독하다. 고독과 슬픔이 유일한 시의 원천인가. 물론 아니다. 시를 짓는 법이 따로 있는 건 아니다.

“기실 시법(詩法)은 길이 없음을 알고 있다/ 길을 만들려고 할 뿐이다/ 이게 뭐죠?/ 어때요?/ 온몸으로 질문을 던질 뿐이다// 오묘한 나만의 이미지와 여백을 만들고/ 그리고는 누군가 매혹 때문에/ 한 꽃송이 속에서/ 그만 길을 잃어버리게 하는 것이다”(‘나의 화장법’)

여성적 생명력과 활달한 상상력으로 한국 현대시의 지평을 넓혀온 문정희(67·사진) 시인이 열두 번째 시집 ‘응’(민음사)에서 시로 펼치는 시론이다. 이번 시집에도 “어머니가 죽자 성욕이 살아났다/ 불쌍한 어머니! 울다 울다/ 태양 아래 섰다/ 태어난 날부터 나를 핥던 짐승이 사라진 자리/ 오소소 냉기가 자리 잡았다”(‘강’) 같은 문 시인 특유의 도발적 여성성이 여전히 스며들어 있지만, 보다 차분하게 내면으로 침잠해 세상과 시를 돌아보는 정조가 더 강한 편이다.

“동물원 철창을 덜컥 열어버린다/ 인간의 손에 더럽혀져 습관적으로 재롱을 떨던/ 동물들 한꺼번에 거리로 기어나왔다// 그런데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군/ 우리야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되었지만 당신들은 왜 이 짓을 하나/ 거리에 나온 동물들이 당황하여/ 노기를 띠고 으르렁거린다// 충혈된 눈알을 굴리며 누군가 던져주는/ 죽은 살코기를 덥석덥석 무는 사람들을 보며/ 어디가 진짜 동물원인가 길을 잃는다”(‘동물원’)

시인이 보기에 세상은 동물원과 진배없다. 사람들이 생명 본연의 야성은 간데없고 누군가 던져주는 썩은 고기에 익숙해진 동물 같다. 시인은 “비겁과 순치로 음험한 도시”에서 “맹수의 본능으로 그 누군가를 물어뜯을 것만” 같아 몸이 근질거린다. 이 못 견딜 가려움이야말로 시인에겐 시 쓰기의 가장 큰 동력일지 모른다. 문정희는 책머리에 “시가 차오를 때면/ 응!/ 야성의 호흡으로 대답했다// 어느 땅, 어느 년대에도 없는/ 뜨겁고 새로운 생명이기를”이라고 써넣었다. “치유 불능의 표현 욕구에 전신이 떨리는 그녀”는 “폐허에 홀로 선 천형의 문자족(文字族)”이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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