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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소중한 시대… 가족이 해체된다면?

입력 : 2014-10-24 00:38:07 수정 : 2014-10-24 00:3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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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행복한 가족’
70대 중반의 허학봉은 큰아들 내외와 함께, 살아있었다면 올해 70이 되는 부인의 제사를 준비하고 있다. 이것저것 부산한 가운데 아들과 며느리는 허 노인의 눈치를 살피느라 바쁘고, 온 가족이 모이기로 한 10시가 다가올수록 집안은 긴장감이 돌며 더욱 분주해진다. 미국에서 산다는 막내는 올해에도 전화로만 안부를 전한다. 교수인 장남은 아버지의 어깨를 주무르다가 팔이 아픈지 은근슬쩍 아내와 교대한다. 벽시계가 10시를 넘어서자 성화를 부리는 아버지를 진정시키기 위해, 장남은 6·25 때 이야기를 꺼내도록 아버지를 유도한다. 허 노인의 이야기 속에선 피란길에 소변보러 나간 꼬마(허학봉)가 전투를 치르는가 하면 갑자기 나타난 호랑이도 한방에 때려 잡는다. 급기야 노인의 허풍은 베트남전으로까지 이어진다.

그 사이 뒤늦게 도착한 고명딸과 사위는 늦은 이유를 둘러대느라 정신없고, 일하다 온 탓에 택시기사 옷차림 그대로인 사위를 향한 가족들의 구박이 시작된다. 온다던 손녀딸을 대신해 낯선 택배업체 직원이 찾아와 간단한 편지와 꽃다발만 전달하고, 시간이 흐를수록 가족 간의 불협화음은 커져만 간다. 결국 허 노인은 기독교 신자라서 절을 할 수 없다며 한사코 거절하는 딸에게 엄마 제사인 만큼 오늘만은 절할 것을 강요한다. 이때 옆에 있던 사위가 “목사인 나도 절하는데 그거 하나 왜 못 해”라고 꾸짖고 나서며 객석의 웃음을 유발한다. 사위는 가난한 개척교회 목사라 택시운전을 겸업하고 있다고 털어놓는다.

손녀가 보낸 편지를 읽는 대목에선 온가족들이 입을 맞춰 ‘어머니 은혜’를 아카펠라로 부른다. 아버지가 옛 앨범을 꺼내 건네주면 자식들은 빛바랜 흑백사진을 들여다보며 당시의 추억을 떠올려보지만 웬일인지 기억력이 그리 신통해 보이진 않는다.

제사상을 차리는 장면은 다소 과장된 몸짓과 안무로 흥을 낸다. 잠시 뮤지컬을 보는 듯하다.

“대자리 깔고, …상 들여 오고, …촛대 들이고, …좌포우회, 어동육서…”

제문을 읽고 절을 올린 뒤 음복을 할 때, 미국에 있는줄 알았던 막내가 찬찬히 들어와 어머니 제상 앞에 무릎을 꿇는다.

“IMF 때 주식 망하고, 엄마가 평생 일으켜놓은 집안까지 말아먹고,… 미국으로 도망갔던 막내예요.”

수근거리던 객석이 금세 슬퍼진다. 공감대가 큰 가족극은 동화가 빠르기 때문이다.

허 노인은 격동의 현대사를 몸으로 지나온 인물이다.

“내가 중동에서 새까맣게 타 와서 막내 너를 낳았다. 뱃속에 거꾸로 서서 네 엄마가 고생 많았다.”

조상신이 편히 드실 수 있도록 제실을 비우듯이 배우들이 모두 무대를 빠져 나간다. 한동안 덩그러니 비어 있던 무대에 마침내 반전이 드리워진다.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저희 패밀리21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족보다 더 가족처럼 느껴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안녕히 돌아가십시오. … 자, 1시간 뒤에 여기 세팅 다시 합시다.”

역할대행 서비스였던 것이다. 결혼식 하객도우미, 장례식 상주 가족 아르바이트, 애인, 남편, 부인, 형제, 심지어 부모까지 대여해주는, 가족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아이디어 직업이 성행 중이다. 하지만 ‘물리적’인 가족의 빈자리를 채워줄 수는 있어도, ‘심리적’인 가족의 빈자리는 채워주지 못한다.

혼자 남은 허 노인이 아내의 초상화를 바라보며 독백한다.

“요즘, 뭐 진짜가 어딨어? 다 가짜지. 가짜.… 우리 둘이서 한 잔할까?… 내 걱정 말고. 나도 곧 따라감세.”

허 노인이 지방을 태운 뒤 촛불을 끄고 초상화를 챙겨 가방을 꾸린다.

‘행복한 가족’(민복기 작, 김용현 연출·사진)은 ‘가족이 해체된다면 미래의 가족은 어떤 형태일까’라는 상상과 ‘일본에는 가족을 빌려주는 대여 업체가 있다’는 풍문에서 출발해, 2014년 가족의 의미를 되묻고, 변화를 돌아보는 작품이다.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보다 나만의 시간을 보내는 데 익숙해진 젊은 세대들에게 ‘나’의 출발은 ‘가족’임을 일깨워주는 가슴 따뜻한 공연이다.

한승도, 류제승, 이중옥, 황성현, 서태영, 박지인 출연. 11월2일까지 대학로 아리랑소극장에서 관객을 맞는다. 월·수·목·금 오후 8시, 토 3시·6시, 일 3시.

김신성 기자 sskim65@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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