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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사람들, 노숙인] 공짜밥보다 더 필요한 건…'할 수 있다'는 자신감

입력 : 2014-10-23 18:39:29 수정 : 2014-10-23 22:2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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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거·생활비 경제지원만으론
노숙인 문제 근본적 해결 안돼
“저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난 16일 서울 양천구 목동종합운동장에서 열린 ‘제6회 서울시 건강자활체육대회’에 참가한 석모(33)씨가 수줍게 웃었다. 3년 전부터 노숙인 시설에서 생활하고 있는 석씨는 장애물달리기 종목에 출전해 구슬땀을 흘렸다. 그는 “평소에는 시설 밖으로 나갈 기회가 별로 없는데 이렇게 야외에서 땀 흘리며 운동을 하니 성취감이 생긴다”고 말했다.

노숙인들의 자활 의지를 키우고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마련된 이날 행사에는 노숙인 시설 40곳에서 1300명이 참가했다. 이른 아침부터 각양각색의 유니폼을 맞춰 입고 관중석을 차지한 노숙인들이 막대풍선을 부딪치며 큰 소리로 자기네 팀을 응원했다. 조금은 느리고 서툰 몸짓이었지만, 함성과 응원 소리만큼은 여느 대회 못지않았다.

행사의 ‘하이라이트’인 이어달리기 순서가 되자 열기는 하늘을 찔렀다. 그러나 이들이 응원하는 것은 1등이 아닌 ‘꼴등’이었다. 꼴찌로 달리는 참가자가 뛰는 것이 힘든 듯 걷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괜찮아”를 연호하며 “끝까지 뛰라”고 외쳐댔다. 마침내 꼴찌가 결승선에 도착하자 관중석에서 박수가 터져나왔다.

이들은 ‘이기는 것’보다 ‘포기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한 가치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노숙인들에게 ‘자활 의지’를 높여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최근 노숙인이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문화·체육 행사가 열리고 있다.

노숙인들의 자활의지를 높여주기 위해 체육·문화 활동을 지원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사진은 홈리스월드컵 대표팀
빅이슈코리아 제공
◆축구, 발레… ‘제2의 인생’ 사는 노숙인들

‘홈리스월드컵’은 가장 규모가 큰 노숙인 국제행사다. 매년 전 세계 60여개국에서 500여명의 노숙인이 한데 모이는 축제로, 팀당 4명의 선수가 출전해 풋살(간이축구) 경기를 치른다. 올해 경기는 칠레 산티아고에서 지난 19일부터 진행 중이다. 한국은 2010년부터 매년 선수를 보내고 있다. 홈리스 월드컵 한국 공식 주관사인 빅이슈코리아는 이달 3일 노숙인 복지시설 31곳이 참가한 ‘홈리스 건강축구대회’를 통해 ‘국가대표’ 10명을 선발했다. 이들은 지난 17일 출국해 경기를 치르는 중이다.

홈리스월드컵의 효과는 단순한 축구경기 이상이다. 홈리스월드컵 조직위원회가 2007년 덴마크 대회에 참가한 노숙인 381명을 대상으로 대회 6개월 후 벌인 조사에서 93%(354명)가 ‘새로운 삶의 의지를 찾았다’고 응답했다. 또 83%는 ‘사회적 관계 형성에 더 능숙해졌다’, 29%는 정규직으로 취직했다고 답했다.

변한 것은 노숙인 뿐만이 아니었다. 대회를 참관한 16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도 ‘노숙인에 대해 긍정적’이라는 응답이 대회 전 58%에서 대회 후 85%로 늘었다. ‘부정적’ 의견은 20%에서 1%로 줄었다.

노숙인 발레단
전문가들은 이 같은 효과가 ‘성취감’에서 온다고 말한다. ‘포기’가 만성화된 노숙인들이 운동을 통해 소속감과 자신감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감정 변화야말로 노숙인 자활의 첫걸음이 된다.

노숙인 지원단체인 비전트레이닝센터의 최성남 소장은 “자활은 동기가 중요하다. 동기가 없으면 아무리 강요해도 자활이 어려운데, 그 힘을 낼 수 있게 하는 것이 운동”이라며 “노숙인들은 대부분 우울하고 몸에 활기가 없는데, 이런 활동을 통해 활력과 자신감을 가지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같은 인식이 퍼지며 최근 노숙인 발레단, 연극단, 합창단 등 노숙인 참여 활동도 늘고 있다. 한 노숙인 쉼터에서 자활을 준비 중인 박모(62)씨는 올해 초 합창단 활동을 하면서 찍었던 공연 사진을 가슴에 품고 다닌다. 그는 “예전에는 내 인생은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합창단 활동을 하면서 많은 것을 느꼈다”며 “제2의 인생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노숙인 밴드 ‘봄날밴드’
◆‘다시 시작’ 할 디딤돌 필요

전문가들은 정부의 노숙인 정책이 이제 ‘구제’보다는 ‘자활’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고 말한다. 한 노숙인 지원센터 관계자는 “노숙을 오래 한 사람들은 ‘자포자기’ 상태이기 때문에 경제적 지원을 해주더라도 노숙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시설에 수용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줘 그들이 다시 거리로 나가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서울시의 다시서기센터는 수년 전부터 박물관 견학 등 노숙인들의 자존감을 고취할 여러 체험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센터 근무자들은 노숙인들을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센터의 한 관계자는 “노숙인들은 사회에서 밑바닥을 치고 왔기에 ‘패배자’라는 인식이 강한데, ‘존중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려 노력하고 있다”며 “자존감을 높여주는 것은 추상적이고 당장은 효과가 없는 것 같지만 노숙인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빠른 길”이라고 말했다.

일본 정부의 정책적 지원을 받는 노숙인 관련 단체는 이 같은 인식 아래 노숙인의 ‘자기결정권’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삼고 있다. 노숙인들은 노숙인 지원 단체 운영과 활동에 관련한 모든 회의에 참석하고 발언권도 갖는다. 또 무료급식 등 각종 지원 활동과 행사 운영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임재옥 대덕대 교수(사회복지학)는 “기존의 노숙인 정책은 성공했다고 보기 어렵다. 새로운 접근법이 필요하다”며 “일회성 지원에 그치지 말고 노숙인을 장애인이나 노인처럼 도움이 필요한 대상이란 인식 아래 자활 의지를 다질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한다”고 제언했다.

김유나·최형창·염유섭 기자 yoo@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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