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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꿈꾸지 못하는’ 노숙인의 아이들… 이대로 둘 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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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4-10-23 20:29:41 수정 : 2014-10-24 01:4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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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이 먹먹하다. 겨우 걸음마를 뗀 어린아이가 도심 광장에서 노숙생활을 한다는 그제 세계일보의 기획보도는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세 살배기 여자아이는 노숙인들과 함께 땅바닥을 뒹굴며 하루를 보낸다. 네 살배기 남자아이는 노숙인이 모은 폐지 더미가 놀이터라고 한다. 노숙인처럼 맨발로 걸어다니고, 바닥에 떨어진 것들을 주워 먹기까지 한다. 수도 서울의 관문, 서울역 광장에서 그간 일상적으로 벌어져온 우리 사회의 맨 얼굴이다. 하늘을 찌르는 초고층 도심 빌딩 사이 가려진 그늘은 이토록 깊었다.

아이 부모들은 대개 노숙인 경험자들이다. 근처 쪽방에서 생활하는 부모들은 일을 나가면서 예전에 아는 노숙인에게 아이를 맡긴다. 이들을 맞는 것은 소주병과 쓰레기가 널브러진 고약한 환경이다. 노상방뇨, 욕설, 싸움질이 벌어지는 노숙인의 일상은 아이들에게 고스란히 전수된다. 기본적인 유아교육은커녕 밑바닥 생활을 몸으로 익히게 된다. 이들은 보호시설에 옮겨지더라도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커서는 노숙인으로 전락할 위험이 크다고 한다. 노숙의 대물림이다. 이런 비극도 없다.

노숙인 2세의 실상은 허술한 복지체계를 웅변한다. ‘복지예산 100조원 시대’라고 떠들지만 곳곳이 허점투성이다. 노숙인에게 각종 지원을 제공하는 정부와 서울시도 2세의 보호에는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출산장려금을 노린 노숙인 임신이 속출하지만 속수무책이다. 이런 비극의 확산을 막자면 자녀 양육에서 자활에 이르는 섬세한 대책을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

정부예산 지원과 공무원 탓만 해서는 안 된다. 중요한 것은 공동체 정신의 회복이다. 노숙인을 보는 우리의 눈길은 겨울바람보다 차갑다. 노숙인을 삶의 깊은 수렁에서 빠져나오게 하려면 ‘재정 사다리’로만 되지 않는다. 사다리를 힘겹게 오르는 그들의 손을 잡아주는 이웃이 있어야 한다. 그들을 따뜻하게 바라보고 도와주는 사회적 연대의식이 절실하다.

러시아 작가 투르게네프가 산책을 하고 있는데 거지가 다가와 동전 한 닢을 달라고 했다. 집에서 갑자기 나오느라 지갑을 들고 나오지 못한 투르게네프는 “줄 게 없어 미안하다”며 거지의 손을 꼭 쥐어 주었다. 거지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말했다. “내 생애에 이렇게 큰 선물을 받아본 적이 없다”고. 소외받은 이들에게 간절한 것은 밥이 아니라 밥을 함께 먹을 이웃이다. 공복의 허기보다 더 매서운 것이 삶의 허기다.

맑고 고운 하늘로 눈이 시린 가을이다. 하지만 노숙인 아이들의 눈에는 소주병과 쓰레기가 어지러운 땅바닥의 잔영만 가득하다. 아이들에게 파란 하늘을 되찾아주는 것은 공동체의 책무다. 그들에게도 보통 아이들과 같은 공평한 꿈을 꾸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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