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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센티멘털, 가을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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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4-10-24 21:24:29 수정 : 2014-10-24 21:3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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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추의 시간 갖는 것은 고귀한 행위
詩 한 수에 세상은 새롭게 달라져
가을을 남자의 계절이라고 한다. 촌스러우면서도 공감 가는 말이다. 왜 가을에 남자인가? 실제 물리적 변화나 호르몬의 이상이 나타나는지 어떤지 잘은 모른다. 분명한 것은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흥미로운 일들이다. 가을만 되면 주변의 남자들이 가만있지 못한다. 쓸쓸하다, 외롭다, 낙엽을 밟으며 시를 생각한다 라고들 말한다. 이것을 단순히 ‘껄떡대는’ 일로만 볼 수 없다. 그 정도도 모를 만큼의 단수는 아니다. 가을남자들은 분명 뭔가 있다.

인생의 추락에 대하여 훨씬 민감한 쪽은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다. 호르몬 변화와도 관련 있다. 삶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소위 ‘반추’의 시간을 갖는 것은 인간만이 하는 가장 고귀한 행위다. ‘반성’ ‘성찰’ ‘회억’ 따위를 하는 사이보그나 동물이나 식물은 없다.

김용희 평택대 교수·소설가
최근 50대 남성 한 분이 시를 써서 내게 읽어달라고 메일을 보내왔다. 그리고 만나 쓴 자작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분은 대학에서 이과를 전공했고 과거 시를 쓰는 사람들을 가장 쓸데없는 한량의 짓거리를 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자신이 이 나이가 되어 ‘시’를 쓰게 되리라고는 눈곱만큼도 생각지 못했다고. 그런데 직장으로 출근하기 위해 아침 낙엽길을 걸어가는데 자신도 모르게 시가 ‘저절로’ 나오더라고. 시를 쓰고 있는 동안에 자신의 마음이 그렇게 평안해질 수가 없다고. 시를 쓰면서 스스로 감수성이 풍부해져 모든 사물들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한다. 시를 쓴다는 한 남성은 회사원이었고 한 남성은 소아과 의사였다. 한 남성은 정년이 다가오는 교수였고 한 남성은 택시기사였다.

한국 사회만큼 시인이 많은 나라도 없다. 메뚜기만 한 땅덩어리에 시인만 1만명이다. 한국만큼 시집이 많이 출판되고 시집출판기념회가 열리고 시창작교실이 많은 나라가 없다. 한국에 노래방이 많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시는 노래이고 리듬이기 때문이다. 생명의 호흡과 우주만물이 거대한 순환의 사이클로 이루어져 있는 한 인간은 노래를, 시를 떠나서 살 수 없다. 시는 리듬이며 반복이며 순환이기 때문이다. 생명의 절정기를 지나 하향길에 접어들 때 비로소 ‘외로운 한 떨림’을 느끼게 된다. 인간이란 기껏 거대한 우주의 한 시간대에 작은 날갯짓을 파닥이는 존재일 뿐이다. ‘지금’이라고 손 안에 쥐고 있는 현재와 과거란 어느새 손가락 사이로 흘러 빠져나가는 모래에 불과하다. 이 이상한 소실점, 수많은 시간들이 사라져가는 나이, 중년의 나이에 비로소 ‘시’가 찾아오는 것이다.

모 중앙일간지 문화부 기자를 만났더니 신춘문예 공모 투고 중에서 시 투고가 몇 만건이나 되고 매년 늘고 있다고 했다. 놀라운 일이다. 시집을 출간해도 팔리지 않고 자비출판이 상식이 되어 있다. 그런데 아직도 시를 쓰고 싶어하다니. 그 문화부 기자의 추측은 이런 거였다. 중년의 은퇴자 때문인 것 같다고. 과거에 중년 여성 문학소녀들이 문화교실을 다니며 시를 썼다면 중년 은퇴자들이 시를 쓰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추측이 맞는지 틀리는지 알 수 없다. ‘수원 남창동 최동호 시 창작교실’은 매주 한 번씩 시낭송을 한다고 한다. 이 모임에 70∼80명의 사람들이 모이는데 이곳에도 남성회원이 많다고.

문학이란 가장 쓸데없는 것을 가지고 가장 쓸 데 있게 하는 것이라고 문학평론가 김현은 말한다. 시 한 편이 단 한 그릇의 국밥보다 못한 시절에 살고 있다. 인간은 단순히 밥 먹고 배설하고 잠자고만 사는 존재는 아니다. 아니 존재다. 하지만 인간은 그런 생존적 물질적 차원을 넘어서려는 존재이기 때문에 아름답다.

가을을 독서의 계절이라고 한다. 하지만 독서하는 사람은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일까 말까다. 단풍구경이니 뭐니 관광지만 북새통이다. 이 가을, 처음 세상을 맞은 작은 강아지처럼 시 한 수 짓는 남성들이 많다는 것이 반갑다. 가을남자들이 찾는 시 한 수, 세상은 새롭게 구성되고 있다.

김용희 평택대 교수·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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