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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사회 꿈꾼 조선말 혁명가 전봉준 일대기

입력 : 2014-10-31 20:58:54 수정 : 2014-10-31 20:5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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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화 지음/생각정원/1만4000원
전봉준, 혁명의 기록/이이화 지음/생각정원/1만4000원


1894년 10월 16일. 전봉준은 충청감사 박제순에게 편지를 보내 일본군과의 전투를 독려했다. “일편단심 죽음을 무릅쓰고 나라의 신하로서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을 쓸어 조선 5000년의 은혜를 갚으려 한다.” 답은 없었다.

같은 달 25일. 전봉준이 거느린 농민군 4000여명, 손병희가 이끄는 농민군은 충청도 공주에서 일본군과 접전을 벌였다. 전봉준의 부하 중 전사한 이가 부지기수였고, 전투 경험이 적은 손병희의 병사들은 대부분 달아났다.

다음 달 27일. 3000여명으로 전열을 정비한 전봉준의 부대는 다시 싸움에 나섰지만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을 당해내기엔 역부족이었다. 부대는 완전히 해산했고, 전봉준은 간신히 탈출했으나 부하였던 자의 밀고로 붙잡혔다.

120년 전의 일이다. 탐관오리와 횡포한 부호의 징계, 신분 차별의 해소, 고른 인재 등용 등을 주장하며 궐기했던 혁명가 전봉준은 1895년 3월 29일 다른 농민군 지도자 손화중, 김덕명, 최경선, 성두한과 같이 교수형에 처해졌다. 수감 당시 전봉준의 인격과 태도에 감동한 일본 공사는 구명운동을 펼쳤고, 사형을 선고한 재판장은 “오늘의 죽음은 매우 유감스럽지만 네가 전라도에서 한번 일어나자…우리나라도 크게 개혁되었다”며 명복을 빌었다.

책은 19세기 말 토지제, 신분제, 남녀 차별 등의 철폐를 외치며 일어났던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 전봉준의 일대기다. 저자는 동학농민전쟁의 기억이 스민 현장을 수십 차례 답사하고 현지인의 증언을 수집했다. 조선 관료들의 기록, 후대 연구자들의 평가와 일본의 기록까지 빠짐없이 살폈다. 특히 당시 일본 밀정들이 쓴 목격담과 신문의 기사를 적극 활용했다. 그 결과 가난에 내몰려 떠돌이 생활을 하다 역적으로 몰려 교수형에 처해지기까지의 인간 전봉준을 되살릴 수 있었다. 손꼽히는 역사학자인 저자인지라 신뢰가 크다. 저자는 “전봉준이 바라던 평등과 자주의 세상이 열렸을까”라고 물은 뒤 “분단으로 인한 갈등이 일어나고 강대국의 간섭이 사라지지 않고 인권을 유리하는 일이 벌어지는 등의 모순은 근본적으로 청산되지 않고 있다”고 적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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