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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영성'들의 눈빛… 무엇을 갈망하는가

입력 : 2014-11-20 21:07:14 수정 : 2014-11-20 21: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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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실크로드를 가다 ③ · 끝 혜초가 탔던 목선과 실크로드탐험대가 탄 6700t급 한바다호는 외견상 구별된다. 그러나 혜초의 구법에 대한 간원(懇願)과 해상 실크로드 답사는 두동지지 않는다. 구법승 혜초의 목선은 천축국까지 연안항로를 이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연안의 불빛이 가물게 빛날 때 혜초의 가슴엔 먹먹한 눈물이 남모르게 번졌을까. 뱃전에서 천축기행문을 쓰다 비를 만나 먹 글씨가 번지는 소란도 광활한 바다 위에서는 윤슬의 잔물결처럼 소박했을 것이다.

인도네시아를 떠난 배는 다시 적도의 무풍지대를 지나 믈라카해협을 통해 믈라카항에 기항했다. 유백색의 노란빛이 감도는 화쓰 꽃을 적도의 바다 위에 던져주고 싶었다. 그러나 나의 손에는 화쓰꽃나무 그늘 한 줌 남아있지 않았다.

입항 전날 현대판 해적의 출몰을 경계하기 위한 선상 해적당직 불침번서기는 혜초의 바닷길 항로가 얼마나 열악한가를 되새기게 한다. 옛 믈라카왕국의 영화와 쇠퇴를 가늠하며 우리는 다시 태국을 거쳐 벵골만의 상공을 날아 콜카타에 들어섰다. 드디어 인도의 첫 밤에 나는 달을 보았다. 보름달이었다. 달 속에 혜초의 얼굴이 거기 얼비쳤다. 

해양 실크로드 탐험대가 찾은 인도 타고르 생가 전경.
왕오천축국전에 기술된 40여개 소국들의 상당 부분이 융성했던 나라 인도, 그 많은 천축의 나라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날이 밝아 콜카타에서 내가 찾은 곳은 인도의 시성 타고르의 생가와 빅토리아 기념관(Victoria Memorial)이었다. 인도의 영성과 자존을 노래하며 조선을 ‘동방의 등불’이라 칭송했던 라빈드라나트 타고르(Tagore)의 생가 가는 골목길에서 구걸하는 아이들과 노점상과 릭샤꾼과 경적을 울려대는 삼륜차가 뒤섞인 혼잡 속에서 나는 두리번거렸다. 인도 문화의 속살은 이런 골목 안쪽에 버성김 없이 드러난다. 낯설지만 아주 낯설지만은 않은 친연(親緣)의 사람들이 거기 있었다.

골목 한귀퉁이 펌프 가에서 샤워하는 남자와 약간은 경계의 눈빛을 던지는 검은 히잡을 쓴 여인까지, 그리고 거리에서 이발을 하는 사람들은 면도거품이 묻은 얼굴로 거울 너머로 미소를 던진다. 그런 인도인에게 영국의 식민지 인도연방의 상징인 빅토리아 기념관은 과연 어떤 생각을 일으킬까. 르네상스양식에 이슬람 양식이 가미된 그 눈부시도록 흰 대리석 건물은 타지마할을 본떠 지었다. 그 눈부심 속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식민의 그늘이 드리웠다. 그런 영연방의 영향은 인도 여정 ‘붓다의 나라’ 내내 눈에 들어왔다. 영국의 주도 아래 건축된 여러 박물관과 타지마할 호텔과 뭄바이 중앙역, 그리고 1911년 영국의 조지 5세와 그의 부인이 뭄바이항을 통해 방문한 것을 기념해 지은 인도의 문은 하나같이 식민역사의 교류와 문화이입의 결과물로 여전히 오롯했다. 

고타마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은 후 같이 수행했던 다섯 제자들에게 첫 설법을 했던 사르나트(sarnath), 일명 녹야원 인근 한국 사찰 안에 혜초기념비를 제막하고 있다.
실크로드 답사팀의 공식일정 중의 하나는 시크교의 성지인 비하르주의 주도 파트나(patna) NIT공과대학에 혜초도서관 현판식과 세미나를 가진 것이다. 비록 공간은 도서실 규모로 소박했고 소장도서는 부족했지만 앞으로 혜초에 대한 인문학적 초석을 다지는 중요한 시발점으로 유의미했다. 식후행사로 한·인도 대학생 문화교류 어울림한마당은 유쾌하고 흥미로운 젊음의 난장으로 성황을 이뤘다. 또 하나 고타마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은 후 같이 수행했던 다섯 제자들에게 첫 설법을 했던 사르나트(sarnath), 일명 녹야원 인근 한국 사찰 안에 혜초기념비를 개막한 것이다. 이 초전법륜(初轉法輪)의 뜻깊은 장소에 혜초가 다녀갔음을 알리는 되새김의 의미였다. 다만 진짜 사르나트, 녹야원 공공장소의 세계인이 목도할 수 있는 곳이 아닌 그 주변 개인 사찰 안에 설치가 돼 접근성이 떨어지는 부분은 아쉬웠다.

나의 여정은 인도를 혜초가 닿았던 동천축(東天竺)에 해당하는 콜카타에서 서쪽 뭄바이까지 가로지르는 2600여㎞에 달하는 열흘 속에 녹아있다. 그중 콜카타에서 파트나까지는 물론 우타르프라데시주의 힌두교 성지 바라나시에서 나시크까지의 1324㎞는 꼬박 24시간을 기차로 이동했다. 침대칸에서 인도 중년사내는 자신이 끼니로 싸온 음식 난(naan)을 나눠주었다. 눅진 난은 특별한 양념이나 소스가 없음에도 담담하면서도 구수했다. 나는 이 인정 많은 콧수염 사내에게 삶은 하얀 달걀을 권했다. 그는 몇번의 사양 끝에 그걸 받아들고 소금에 찍어 먹었다. 먼저 그는 오늘 여섯 개의 달걀을 먹었다고 애교있는 허풍을 떨었다. 자이차(茶)를 파는 사람과 주전부리 간식을 파는 사람, 심지어 기차통로 바닥을 맨손에 무릎걸음으로 훔치며 승객에게 구걸하는 아이들까지 인도의 기차 안은 다양한 종족과 신분과 처지에 놓인 사람들의 시절인연들로 북적였다. 보석디자인과 제작을 한다는 젊은 인도 부부의 활달함 속에 얼비치는 수줍음은 묘한 매력을 주었다.

혜초는 길 위의 승려였다. 그의 구법(求法)은 인도의 고대대학인 비하르주의 파트나에서 남동쪽 55마일에 위치한 날란다(Nalanda)대학에도 닿았을지 모른다. 5세기에서 12세기까지 필라제국 아래 불교의 승가대학은 그 잔해와 터전만이 오롯한데 내 귓전엔 젊은 학승들의 독경소리와 명상의 침묵이 다 같이 갈마든다. 1만여명의 승려와 2000명의 교수진, 15개의 수도원에 자체적인 급수와 배수시설까지 갖췄던 이 대학엔 뜨거운 햇살이 내리쬔다. 허물어진 벽 붉은 벽돌 틈에 뿌리내린 나무의 푸른 잎이 사뭇 대조적이다. 바라나시는 인도 인구의 80%를 차지하는 힌두교의 성지다. 더구나 가트(Ghat)는 갠지스강 서쪽 6㎞에 걸쳐 여든네개가 있다. 밤의 갠지스강 뱃전에서 본 힌두교의 횃불 의식은 원시적인 듯하면서 비주얼한 퍼포먼스의 묘한 주술성이 느껴진다. 주말이라 그런지 발 디딜 틈 없이 세계 도처에서 온 관광객들과 힌두교도들, 심지어 개와 소들까지 한데 불야성을 이뤘다. 혜초에게는 이 이교도의 의식이 어떻게 비쳤을까. 불가적인 득도와 힌두적인 세계관은 얼마나 두동지고 또 접점이 있을까. 바라나시 이튿날 아침에 큰 화장터가 있다는 마니카르니카 가트(Manikarnika Ghat)에 가려고 했으나 사이클론이 당도하는 바람에 그쪽 방향만 쳐다봐야 했다. 현지 가이드는 죽으면 모두 가트에서 화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죽은 아이들이나 임신부는 화장에서 예외라고 한다. 화장터의 연기가 낮게 퍼져 안개처럼 드리운 가트의 돌계단에는 소똥과 꽃과 타다만 향과 쓰레기가 비에 젖을 것이고 갈비뼈가 드러난 비루먹은 소와 개는 여전히 어슬렁거릴 것이다. 

힌두교의 성지 바라나시에서 나시크까지의 1324㎞를 달리기 위해 찾은 바라나시 기차역 풍경.
부다가야 인근의 영취산(靈鷲山) 정상 부근엔 붓다가 수행하며 제자들에게 설법을 했던 석단(石壇)이 있다. 그러나 정작 산 정상에는 일본의 자본이 지은 현대식 사찰이 생뚱맞게 자리하고 있다. 주객이 전도된 느낌에 아연실색하였다. 일본의 교묘하고 몰지각한 문화적 책략과 인도의 문화적 개방성이 낳은 안타까운 현장이 아닐 수 없다.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게 된 산 입구에는 대나무지팡이를 파는 아이들이 끈질기게 따라붙는다. 독수리들이 붓다가 수행했던 산마루 창공을 선회하던 그곳까지 젊은 혜초도 지팡이를 짚고 올라갔을까. 붓다가 머물던 자리에 그도 가부좌를 틀고 앉아 지긋이 눈을 감았을 것이다. 부처의 자리가 어디 따로 있겠는가. 그 선처(善處)는 지금 내 마음 어디에 방황하는가.

글=시인 유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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