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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장이끼리 만남… 정치체제는 문제 안 돼요”

입력 : 2014-11-21 20:06:26 수정 : 2014-11-21 23: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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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한잔 나누며] 남북공동 겨레말큰사전 한용운 편찬실장 남북 교류사업은 정치적 영향을 많이 받는다. 남북관계가 좋을 때는 급물살을 타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경색이 풀릴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남북 언어를 한 곳에 담는 겨레말큰사전 편찬사업도 마찬가지다. 2010년 천안함 폭침 뒤 5·24 조치로 사업이 중단돼 5년 동안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다행히 올 들어 남북관계가 다소 개선되면서 지난 7월 중국 선양에서 남북 편찬자들이 만남을 가졌고, 지난달 평양에서 편찬회의가 열리면서 사업이 완전히 정상화됐다.

한용운(47)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위원회(공동편찬위) 편찬실장은 편찬 재개를 누구보다 손꼽아 기다린 사람이다. 한 실장은 2005년 2월 사업을 시작할 때부터 10년째 편찬과 실무를 맡고 있는 ‘살림꾼’이다. 평양에 다녀온 결과물을 정리하느라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그를 지난 20일 서울 마포구 공동편찬위 사무실에서 만났다.

오랜만에 평양을 다녀온 소감을 묻는 질문에 한 실장은 “예전에 비해 활기차고 밝아진 느낌을 받았다”며 “거리가 많이 밝아졌고, 신축 건물들이 많이 들어섰다”고 말했다. 

한용운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 편찬실장은 “남북의 편찬자들이 외부적인 일에 영향 없이 편찬작업에 매진할 수 있도록 기대와 응원을 부탁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제원 기자
사실 평양에서의 일정은 시내를 천천히 둘러볼 수 있을 정도로 여유롭지는 않았다. 한 실장은 “7일 동안 7개조로 나눠 매일 오전 9시30분터 오후 6시까지 1만8000여개 단어 뜻풀이를 합의했다”며 “결론에 이르지 못한 것은 밤늦게까지 개별적으로 검토하고 다음 날 다시 모여서 밤새 고민한 것을 가지고 또 회의를 했다”고 회고했다.

편찬자 중 일부는 일흔이 넘은 고령이다. 철야 작업이 고되지는 않을까. 한 실장은 영국의 철학자 새뮤얼 존슨 이야기를 소개했다. 그는 “존슨은 사전편찬가를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면서 사소한 일을 꾸준히 하는 사람’으로 정의했는데, 이 정의처럼 대부분의 사전편찬가는 큰 욕심이 없고, 생활이 아주 규칙적인 편”이라며 “모두 건강하고 정열적으로 사전 편찬 작업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전 편찬에는 남북 50여명의 편찬자가 참여하고 있다. 남과 북에서 사전 편찬에 잔뼈가 굶은 사람들이다. 한 실장은 “북측 편찬위원은 조선말대사전 개정에 꾸준히 참여해서 어휘 감각이 뛰어나다”며 “대신 남측은 (외국의) 사전 편찬이론을 접할 기회가 상대적으로 많다”고 말했다.

보통 북한 사람을 만난다고 하면 신기하게 생각하지만 한 실장에게 북측 편찬위원들은 ‘사전장이’일 뿐이다. 그는 “첫해에는 북측 분이라는 의식이 당연히 있었고, 말이나 몸가짐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며 “하지만 지금은 10년째 만나고 있고, 그 만남이 짧고 귀하기 때문에 하나라도 더 논의하려고 하다 보니 사전장이 대 사전장이로 만난다는 느낌이 강하다”고 말했다.

사전장이들은 이념적인 뜻풀이는 빼고 낱말 자체에 집중해 사전을 만들고 있어 정치 체제가 다른 것이 문제가 된 적은 없다고 한다. 다만 제도적 차이 때문에 합의할 일이 생긴다. 한 실장은 “북측 편찬위원이 남측의 세금 관련 용어가 너무 많으니 대표적인 것 몇 개만 두고 나머지는 모두 빼야 한다는 지적을 한 적이 있었다”며 “예를 들어 세금 직접세 간접세 등은 사전에 넣고, 특별소비세 간접국세 등은 수록하지 말자는 의견을 제기했을 때 하나하나 협의를 하면서도 남쪽은 세금 관련 용어가 많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있다”고 말했다.

겨레말큰사전은 70% 정도 완성됐다. 내년부터는 속도를 내기 위해 한 번 회의 때 2만2000여개 단어를 논의하기로 했다. 앞으로 중단되는 일이 없다면 2019년에 완성된다. 한 실장은 “사전편찬자들은 성격이 꼼꼼해서 약속 어기는 것을 싫어한다”며 “외부적 이유만 없다면 시간 내에 완성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한 실장 개인적으로도 겨레말큰사전은 꼭 완성해야 하는 사전이다. 그는 국문과 졸업을 앞두고 학회에 참석했다가 ‘사전편찬학 연구’라는 책을 본 것을 계기로 사전 편찬에 뛰어들었다. 국립국어원에서 7년 동안 표준국어대사전을 만들면서 사전장이로 무르익었다. 30대 후반에 시작한 겨레말큰사전 편찬이 끝나면 50대 중반에 접어들게 된다. 겨레말큰사전은 사전편찬자로서 한 실장이 전성기를 다 바친 사전인 셈이다.

한 실장은 “처음에는 과연 사전이 완성될 수 있을까 의구심도 들었지만 새로운 편찬지침으로 새로운 어휘를 만난다는 생각과 국가적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한다는 생각으로 참여했다”며 “겨레말큰사전은 남북 언어 이질화 해소에 기여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태어나서 이렇게 의미 있는 일을 하기가 쉽지 않다”고 환하게 웃으며 인터뷰를 마쳤다.

오현태 기자 sht98@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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