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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의 나마스테!] "세월호 참사 후 문단에 변화 바람… 새로운 참여문학 움틀 것"

입력 : 2014-11-24 20:49:59 수정 : 2014-11-24 20:4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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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작가회의 40주년 행사 이끈 이시영 이사장 지난주 토요일(22일) 서울 중구 다동 일대 주점에서는 문인들의 노랫소리와 술잔 부딪치는 소리가 흘러나와 스산한 가을밤을 덥혔다. 한국작가회의 소속 문인들이 서울시청 다목적 홀에서 창립 40주년 행사를 마치고 쏟아져 나와 이곳에서 뒤풀이를 치른 것이다. 지방에서 올라왔거나 새벽에 미처 귀가하지 못할 문인들을 위해 주최 측은 인근 여관까지 잡아놓고 친절하게 약도를 인쇄해 배포하기도 했다. 엄혹한 유신체제에 맞서 성명을 낭독하면서 시작된 ‘임의 단체’가 이제 성년을 훌쩍 넘기고 책임감 막중한 ‘사단법인’이 되어 불혹의 나이에 이른 것이다. 팔순의 고은 시인에서부터 이십대 소설가까지 모처럼 한자리에서 만난 이들은 빛깔은 다르지만 모두 깊은 감회에 젖어든 풍경이었다. 

한국작가회의 이사장 이시영 시인. 그는 “세월호 사건 이전과 이후의 문학은 다를 것”이라면서 “이미 조짐이 나타나고 있듯이 새로운 참여문학이 움틀 것 같다”고 전망했다.
김범준 기자
행사 하루 전인 지난주 금요일 오후, 광화문에서 한국작가회의 이사장을 맡고 있는 이시영(65) 시인을 만났다. 그는 작가회의 전신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자실)가 1974년 출범할 때 문인 101인 성명서를 낭독하는 고은 시인 뒤에서 소설가 송기원과 플래카드를 들고 서 있던 26살의 청년이었다. 자실의 막내였던 그가 이제 그 단체의 대표가 되어 40주년 행사를 준비하고 치러낸 것이다.

“뭣도 모른 채 플래카드 들고 거리의 결사체로 시작해 40년이 지나 그런 단체의 장이 돼서 기념식을 치르리라곤 꿈에도 몰랐습니다. 강령이 있던 것도 아니고 사무실이 따로 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들고 다니는 가방이 캐비닛이었고 앉아 있는 곳이 사무실이었죠. 101명으로 시작된 그런 단체가 이제 지회 지부까지 합쳐 3000명이 넘는 회원을 거느리는 문인 대중단체가 됐습니다. 내일 행사에서 이사장 자격으로 폐회사를 할 때 ‘작가회의 40년 기념식을 끝으로 이상 해산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건 어떠냐고 농담한 적도 있습니다.”

물론 다음날 그가 농담을 실천에 옮긴 건 아니다. 사실 1974년 생겨난 ‘거리의 문인단체’는 그 시대가 요구한 자연스러운 내발적 표출이었다고 보는 시각이 맞다. 4·19혁명의 기운이 10여년간 무르익어 김동리 조연현이 장악한 문인협회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시대적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후 1984년 5공화국의 문인 탄압이 절정을 이루던 시점에서 재창립을 했고, 6월항쟁 이후에는 ‘민족문학작가회의’라는 명칭으로 바뀌었다가 글로벌시대에 맞춰 ‘한국작가회의’로 거듭난 과정이 시대마다 달라진 요구를 대변한다.

“신경림 시인의 ‘농무’나 황석영의 ‘객지’ 같은 새로운 문학이 나오지 않았다면 자실 창립은 불가능했을지 모릅니다. 이런 조건에서 김지하라는 인물이 옥중에서 투쟁하는 가운데 고은이라는 순수 허무주의 시인이 급격한 전향을 해서 열정을 불살랐고 백낙청 염무웅 같은 평론가들이 ‘창비’라는 후방기지에서 이론을 생산해내면서 단체가 생겨나고 지속 가능했던 거지요. 이제 박민규에서 고은까지 3세대가 공존하는 거대 단체가 됐어요. 이들에게 공통되는 최소 강령은 ‘민주주의’밖에 없을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이 시대의 문학적 요구도 점차 선명해질 것 같습니다. 세월호 사건 이전과 이후의 문학이 확연히 달라지리라고 봅니다. 이미 그런 조짐은 나타나고 있습니다.”

1970년대나 1980년대처럼 ‘운동’이 전면에 부각되어서는 안 되고 문학을 통해 삶을 증언하고 풍요롭게 하는 데 우선 방점이 찍혀야 한다는 내부 목소리도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젊은 문인 회원들이 피상적으로 알던 ‘유신’이나 ‘광주’ 같은 과거에 비해 ‘세월호’는 직접 어린 생명들이 수시간에 걸쳐 수장되는 과정을 생생한 중계 영상으로 접한 것이어서 이들이 느낀 충격은 결코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진단이다. ‘문학동네’에서 펴낸 박민규 진은영을 비롯한 젊은 문인들의 에세이집 ‘눈먼 자들의 국가’가 작지 않은 파장을 일으킨 데서 증명되듯이 ‘새로운 참여문학’이 전개될 것이라고 이시영 시인은 본다.

전남 구례에서 자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전주 영생고를 거쳐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한 이 시인은 대학 입학 이듬해인 196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와 ‘월간문학’에 시조와 시가 연달아 당선되면서 무난하게 문단에 입성했다. 이미 고교시절부터 ‘학원’ 문단에서 이름을 날렸던 문학 영재였다. 서정주 김동리가 그의 스승이었다. 대학시절에 단짝이 된 소설가 송기원도 만났다. 이 두 사람은 흑석동 하숙집에 같이 있다가 엉겁결에 ‘남산’으로 끌려갔다. 1974년 1월 7일 문인 61인 개헌지지 선언자 명단에 평론가 염무웅이 허물없는 후배들이라고 이름을 올린 탓이었다. 그것이 그의 기나긴 인생의 한 방향을 결정지은 단초가 되었다. 이후 이시영과 송기원은 자실의 막내로 잡다한 실무를 감당하는 ‘움직이는 사무실’이 된 것이다. 1980년 출판사 ‘창작과비평사’에 입사하면서는 ‘창비’의 주간이자 편집장으로 폐간을 겪었고, 김지하 시집 ‘타는 목마름으로’를 펴낸 뒤 끌려가 고초를 당했으며, 80년대 말에는 황석영의 방북기를 계간지에 실었다가 급기야 구속까지 되었다.

그가 1976년 펴낸 첫 시집에는 ‘정님이’나 ‘후꾸도’ 같은 이야기 시가 농촌공동체의 서정적인 감성을 배경으로 흘러간다. 관념적인 시들이 대접을 받는 1960년대 후반 신경림 시인의 ‘농무’ 같은 이야기 시가 던진 충격은 컸다. 장삼이사의 이야기를 잘 포착해서 들려주는 것만으로도 감동을 수반한 훌륭한 문학이 될 수 있다는 데 이 시인은 눈을 떴다고 했다.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정님이’의 마지막 부분은 이렇게 흘러간다.

‘빈 정지 문 열면 서글서글한 눈망울로/ 이내 달려나올 것만 같더니/ 한번 가 왜 다시 오지 않았는지 몰라/ 식모 산다는 소문도 들렸고/ 방직공장에 취직했다는 말도 들렸고/ 영등포 색시집에서 누나를 보았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어머니는 끝내 대답이 없었다/ 용산역전 밤 열한 시 반/ 통금에 쫓기던 내 팔 붙잡다/ 날랜 발, 밤거리로 사라진 여인’

그는 “밭에서 무까지 다 뽑고 가을걷이가 끝나면 시골의 적막한 풍경을 견디지 못하고 집중적으로 처녀들이 야반도주를 했는데, 뭔가 쓸쓸하고 기적 소리 울리면 떠나고 싶은 그런 아련한 정서가 내 시의 기본 바탕을 이룬 것 같다”고 말한다. 첫 시집 이후로는 80년대 고난의 터널을 통과하면서 시에 집중하지 못하다가 10여년이 지난 뒤에서야 후속 시집을 냈다. 이후 그는 신문 기사를 시로 원용하는 형식 실험도 하고 짧은 한두 행의 시를 구사하기도 하면서 이야기 시와 짧은 시를 오가는 창작 활동을 펼쳤다. 2003년 ‘창비’ 주간 겸 부사장 직함을 마지막으로 ‘자유인’이 되면서 펴낸 ‘은빛 호각’ 같은 시집에 이르러서는 시대의 부채감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서정을 한껏 펼치면서 백석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등을 연달아 수상했다. 단국대 문예창작과 초빙교수이자 이 대학 국제문예창작센터의 책임자까지 겸하고 있는 그는 담담하게 만년의 소망을 털어놓는다.

“사회적 책임에 매여 나 자신을 뛰어넘는 큰 세계, 대자유를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일상에서 고뇌하면서 성실하게 살아낸 두보의 삶도 훌륭하지만 이백 같은 자유로운 삶과 기개가 부러운 게 사실입니다. 문학이란 기본적으로 자유로운 영혼과 활달한 기개에서 나오는 거지요. 이젠 나 자신의 삶을 살고 싶습니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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