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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정윤의 내밀한 미술사] <10> 렘브란트의 말년의 작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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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4-12-01 11:31:57 수정 : 2014-12-01 18:4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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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노년의 작품에서는 오랜 세월 고수해 온 인습적인 표현이 무언가 다른 것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저하된 시력과 떨리는 손 때문에 장시간 작업에 몰두하기 힘들지 몰라도, 그 속에는 늘 보는 이들을 압도하는 원초적인 힘이 숨어있다. 꼼꼼하게 무언가를 잘 그려서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냥 툭 던져버린 듯한 물감들이 놀랄만한 색의 조화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규율에 순응하고  이성으로 통제되는 색과 형태는 거의 사용되지 않기 때문에 난해하고 모호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요소들은 감상자들을 감정적으로 흥분시키고,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는 사유의 기회를 제공한다. 위대한 대가들만이 다다를 수 있는 숭고한 세계가 바로 여기에 있다.

티치아노, 렘브란트, 터너 그리고 모네의 말년의 작품들이 공통적으로 보이고 있는 특징은 조금도 망설임 없이 붓 자국을 캔버스에 고스란히 남겼다는 점이다. 거친 필촉과 넓은 붓면으로 평면을 급히 휘갈겨 그린듯한 자국들이 눈에 들어오고 가까이서는 무엇을 그렸는지 잘 알아보기가 힘들다. 그러나 작품에서 좀 물러서서 바라보면 그것들은 거짓말처럼 완벽하게 보인다. 이 같은 결과는 억지스럽고 과다하게 표현하는 것을 버리고, 불필요한 과정을 모두 생략했을 때 비로소 얻어질 수 있다.

런던의 내셔널갤러리에서 렘브란트의 말년의 작품을 총망라한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빛과 어둠을 극적으로 표현하는 렘브란트의 후기 양식은 명확하게 무언가를 그리려는 의도를 배제한 채,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폐허와 같은 풍경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생전에는 좋은 평가를 받을 리 없었던 모호한 성향은 시간이 한참 흘러서야 그 예술적 중요성이 재평가되었다. 결코 사그러들지 않는 빛과 색의 강렬한 힘 속에서 미의 본질,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한계를 넘어선 렘브란트 예술의 정수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위대한 예술가가 숙명처럼 거쳐간 말년의 작품들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아도르노에 의한 ‘베토벤의 말년의 양식’ (1937년)이라는 연구로 거슬러올라간다. 오리엔탈리즘으로 일세대를 풍미했던 학자 에드워드 사이드가 유작으로 남긴 ‘말년의 양식에 대하여’라는 책도 기억에 새롭다. 음악과 미술에서 보이는 말년의 작품들은 파격적인 자유와 혁신을 갈망하는 마음과 우주까지 아우르려 하는 의지가 묻어난다.

아도르노는 베토벤이 말년에 집필한 현악곡과 특히 마지막 교향곡 9번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이윽고 주관적인 것으로 넘쳐나 통제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그러다 그곳에 남겨지고 잊혀 버린듯하다. 주관성이 폭발함과 동시에 그 파편들은 산산이 흩어졌다. 작은 조각으로 분해되어, 그냥 버려진 채로 있는 것처럼 들리지만 결국에는 그 자체가 표현으로 전환된다.” 이러한 폭발적인 힘과 거친 부분이 주는 여운은 베토벤의 음악뿐만 아니라 렘브란트가 세상을 떠나기 10년 전 정도부터 그린 작품에서도 공통적으로 보인다. 일명 ‘유대인 신부’라는 타이틀로 친숙한 ‘이삭과 레베카’에서 우리는 상식을 뛰어넘은 강렬한 힘을 찾아볼 수 있다. 숨죽이며 신부의 가슴에 손을 올린 신랑의 오른손과 그 위에 다소곳이 얹어진 신부의 왼손은 앞으로의 인생의 반려자로서 서로를 받아들이는 엄숙한 맹세와도 같다.

렘브란트의 ‘이삭과 레베카’ (일명 ‘유대인 신부’, 1669년경, 121.5cm x 166.5cm, 암스테르담 국립 미술관)

렘브란트의 ‘이삭과 레베카’의 부분


이 그림을 1885년에 처음 본 반 고흐는 자신의 친구에게 “다 말라 푸석푸석해진 빵조각만 먹으며 이 그림 앞에서 2주일 동안만 앉아있을 수 있다면 자신의 인생에서 10년을 포기해도 좋다”라고 고백했다. 평범할 수도 있는 신랑신부의 신체적 접촉은 신비할 만큼 고요하고 뭉클한 감동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 작품을 보고 있으면 팔레트와 캔버스 사이를 쉴 새 없이 오가며 움직였을 손길이 그대로 느껴진다. 광기를 내뿜듯이 온갖 색의 물감을 불규칙적으로 바르며, 심지어 두꺼운 물감층을 막대기나 나이프로 긁은 자국이 선명히 남아있다. 물감은 그림을 그리기 위한 재료가 아니라, 그의 열정과 혼을 그대로 담아내는 유일한 도구였던 것이다. 마치 음악의 완성을 위해서라면 인간의 목소리까지도 동원해 통합된 우주의 세계로 만들어버린 베토벤의 9번 교향곡처럼 그 무질서한 물감 자국들은 전율을 일으킨다.

렘브란트의 말년의 작품들이 갖는 특징을 말하기 전에 늘 먼저 이야기되는 것이 중년 이후의 그의 삶이다. 대표작으로 잘 알려진 ‘야경’이 완성되고, 자신의 부인인 사스키아가 별세한 1642년부터 이후의 27년 동안 천재화가로서의 영광이 아닌 굴곡지고 힘든 고비를 맞이하였다. 작가의 주관적인 색채가 강해질수록 작품의 인기가 떨어졌던 것은 사실이고, 이 같은 일련의 일들이 거듭되다 보니, 결국 개인 파산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당시의 재판 기록과 개인 파산을 신청한 후 남을 재산을 처분했던 장부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현실로 닥친 금전적 어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회화뿐 만 아니라 판화같이 비교적 쉽게 거래가 가능한 분야에도 의욕적으로 도전하였다. 파산이 확정된 직후 그에게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졌다. 새로 지어진 암스테르담 시청사의 가장 중요한 자리에 걸릴 대작 ‘클라우디우스 시빌리스와 바타비아인들의 음모’의 주문을 받은 것이다. 이 기회를 살려 어떻게 해서든 암스테르담 지도층들로부터 다시 많은 주문을 받아 재기할 기회로 삼고 싶어 했던 렘브란트는 자신의 작품 중에서 가장 큰 사이즈의 작품을 완성하였다.

렘브란트의 ‘클라우디우스 시빌리스와 바타비아인들의 음모’ (1662년, 196cm x 309cm, 스톨홀름 국립 미술관) 원화는 암스테르담 시청사의 벽을 장식하기 위해 제작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그림으로 교체되고 작품값도 지불하지 않은 불운의 작품이 되었다. 대작인 탓에 처분하기가 힘들다고 생각한 렘브란트는 원래 사이즈의 4분의 1로 잘라내어 다른 컬렉터에게 판매하였다. 1734년의 암스테르담의 경매 기록에 따르면 니콜라스 콜이라는 상인이 작품을 낙찰하였고, 그의 사후 스웨덴인의 부인의 손으로 넘어가 현재에는 스톡홀름의 국립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애꾸눈의 지도자와 바타비아인 동지들의 충성심을 나타내는 장면에서 칼을 맞대고 서약하는 장면을 선택하였고, 엄숙한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극적인 명암의 효과를 이용하였다. 테이블보의 윗면이 발하는 하이라이트는 마치 화면위의 수평선처럼 드러나고, 금속의 칼들이 발하는 반사광에 비친 인물들의 얼굴은 투박하고 웅장하게 등장한다. 복잡한 도상이나 세밀한 표현을 일체 배제하고, 단지 어둠 속에서 발하는 인공적인 빛이 주는 극적 효과와 인물의 심리적인 묘사에만 집중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마치 동시대의 작가들이 도전했던 세련된 색감과 유행하는 구도를 따르지 않고,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긴장감 넘치는 장면을 장대한 스케일로 연출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다른 조건들과는 타협하지 않고 극단적인 작가의 비전을 중시한 이 반년도 가지 않아 시청의 벽에서 내려지고 말았다. 일생일대의 중요한 기회로 작용할 수 있던 이 일이 예기치 못한 결과로 끝나고 만 것이다. 작품값도 받지 못해 분노한 렘브란트는 대작인 원화를 주요인물들이 들어간 부분만 남기고 나머지 부분은 잘라내고 말았다. 어떻게 해서든 경제적인 보상을 받지 않으면 안되었기에 다른 컬렉터에게 판매하는 방법을 택했던 것으로 보인다.

렘브란트의 ‘포목상 조합의 이사들’ (1662년, 191cm x 279cm, 암스테르담 국립 미술관) 큰 화폭에 다수의 인물을 그린 초상으로는 마지막 작품.

이러한 불운한 결과가 있었을지라도 성공과 실패라는 양분법의 논리로 그의 말년의 작품이 평가될 수 없다. 그만큼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상황에서도 당시 유행했던 스타일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추구하는 화풍을 더욱 견고히 했다. 과감하게 화법을 바꾸고, 인물과 사물의 자연스러움을 중시하였다. 암스테르담 포목상 조합원들의 단체 초상화에서 보여지는 섬세한 표정은 마치 그들의 내면의 구현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지금이라도 당장 일어서서 캔버스 밖의 우리들에게 말을 걸어올 듯한 생동감 넘치는 화면은 원숙의 경지에 도달한 예술가가 아니고서는 보여줄 수 없는 명장면이다. 

렘브란트의 ‘63세에 그려진 자화상’ (1669년, 86cm x 70.5cm, 런던 내셔널갤러리) 1669년 10월 4일 세상을 떠난 렘브란트가 같은 해 제작한 마지막 초상화.

늙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듯, 노년의 렘브란트는 많은 자화상을 남겼다. 생을 마감한 63세의 렘브란트의 모습을 앞에 두고 우리는 붓을 놓는 마지막까지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그림을 그리기 위해 고분 분투한 그의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 그의 사후에 쓰인 전기에서 하우브라켄은 “렘브란트가 인생의 가을 무렵부터 찾아 나선것은 영광이 아닌 자유였다”라고 평했다. 그의 말년의 작품 속에 격정적인 흥분이 사방으로 방사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창작에의 갈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전시회 정보
렘브란트: 말년의 작품들
런던 내셔널 갤러리 2014년 10월 15일 ~ 2015년 1월 18일
암스테르담 국립 미술관 2015년 2월 12일 ~ 2015년 5월 17일


양정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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