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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진의청심청담] ‘임원경제지’, 250년 만에 한류의 빛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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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4-12-08 20:22:42 수정 : 2014-12-08 20:2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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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자 서유구 재조명 본격화
한·중·일 문화경쟁의 ‘첨병’ 기대
다산 정약용과 더불어 조선 후기 실학을 이끌었던 풍석 서유구(1764∼1845) 선생에 대한 재조명사업이 만시지탄의 감이 있지만 탄신 250주년을 맞아 기념식과 함께 풍석문화재단 추진위원회 발족(지난 12월 4일)으로 활기를 띠고 있다.

풍석 선생의 재조명사업은 그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완역사업과 함께 새로운 한류, 창조경제의 좋은 소재로 착상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된다. 드라마와 K-팝으로부터 점점 뜨거워지고 있는 한류를 어떻게 생활문화 전반으로 확대재생산하고, 한국문화 세계화의 새로운 아이콘으로 끌어갈 것인가는 시대적 과제일 것이다. 임원경제지는 서유구가 만년에 저술한 농업생활경제백과사전으로, ‘임원십육지’ ‘임원경제십육지’로 불리기도 하는데 총 113권 52책의 우리나라 최대의 백과사전이다. 농업은 물론이고 잃어버린 우리 생활문화 전반을 복원할 수 있는 집대성으로 한류의 아이디어를 찾고, 개발하고 실용화하는 보물단지로 기대된다. 

박정진 객원논설위원·문화평론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18세기는 백과전서의 시대였다. 유럽에서는 프랑스와 영국이 백과사전을 선도했었고, 청나라에서도 여러 종류의 백과사전 편찬 붐이 일었다. 각 나라가 자신의 문화를 총정리하면서 지식의 대중화와 함께 민주주의의 다음 세기를 준비하던 시대였다. 조선도 이에 뒤질세라 크고 작은 사전들을 편찬했는데 양과 질에서 백과사전 중의 사전이 임원경제지였다. 이러한 방대한 작업은 서유구 당대에 이루어진 것이라기보다는 가업으로서 축적된 농업과 과학의 전문적인 지식 위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풍석의 아버지 서호수는 ‘해동농서’(海東農書)를 지었으며, 할아버지 서명응은 경서에 밝아 정조의 규장각 설립에 깊이 관여하였을 뿐 아니라 천문학자로서 이름이 높았다. 서명응은 ‘북학파의 비조’로 불리기도 했다. 서씨 집안이 과학적 사고를 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공리공론에 빠진 성리학을 극복하고 시대정신에 맞게 실학을 실천할 수 있는 가장 큰 무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실학의 가장 적임자가 될 수 있는 배경을 가진 서유구에게 농사는 농업·목축·산림·어업·공업·상업 등의 제반 경제활동을 모두 포괄하는 것이었다.

흥망의 기로였던 18세기. 이때 눈에 띄는 세 선비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과거에 급제하고 규장각초계문신이 된다. 다산 정약용(1762∼1836: 정조 13년 문과 급제), 풍석 서유구(1764∼1845: 정조 14년 증광문과에 급제), 풍고 김조순(1765∼1832: 정조 9년 정시문과 급제). 초계문신은 정조가 젊은 선비들로 자신의 세력을 구축하기 위해서 만든 제도였다. 이들은 나름대로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관료로 나아간다. 그런데 이들은 당색이 갈린다. 다산은 남인, 풍석은 소론, 풍고는 노론이다. 당쟁으로 얼룩진 전 시대의 아픔을 안은 이들에게도 여전히 당색은 거리감을 좁히지 못하게 하였다.

18세기 실학의 시대는 참으로 조선의 국운이 달린 시기였다. 정약용은 성리학 체계 내에서 개혁적 실학을 주장했고, 김조순은 영의정 김창집의 4대손으로 순조의 장인이기도 한 입지를 이용하여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기초를 다진 인물이 된다. 서유구는 과학적인 실증을 토대로 선진문물에 대한 개방과 민생의 실용후생을 택했다. 임진왜란 전만 하더라도 일본에 문물을 전해주던 시혜자의 입장에 있던 조선은 유성룡의 징비록 이외에는 반성이 없었고, 다시 명나라에 사대를 일삼으며 공리공론의 당쟁을 일삼으며 나라를 농단한다. 참으로 한 나라의 흥망이 기로에 있을 때 지도층의 역할은 국운을 가른다.

노론 훈구파와 남인 사림파들은 권력경쟁을 하지만 결국 노론의 득세로 나라는 노론천지가 된다. 자신의 정신과 혼을 빼버리고 성리학으로 교체한 뒤 사대를 지상명령인 양 수행한 송시열을 위시한 성리학 판박이들은 주체성을 아예 없애버린다. 이런 사대주의는 이미 훗날 식민을 약속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영·정조에 이르러 잠시 주체성을 찾는가 했던 조선은 불행하게도 수십 차례의 시해의 위협을 겪다가 끝내 숨진 정조(1752∼1800)의 죽음으로 18세기 근대화 계몽시대를 수포로 돌려버리고 실학의 실패와 함께 구한말을 맞았던 것이다.

일명 도자기 전쟁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덕에 조선의 수많은 도공과 문화재를 잡아가고 훔쳐간 일본은 그것을 바탕으로 구미의 선진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문화대국으로 일어선다. 그러는 와중에 중국대륙에 청나라가 들어서고 때마침 유럽에 도자기를 수출하던 청나라가 그것을 멈추자 일본은 유럽에 조선도공들이 만든 도자기를 수출하여 근대화의 자본을 마련한다. 참으로 조선은 철저하게 일본의 근대화를 위한 제물이 되었다. 근대화를 이룬 일본은 다시 조선을 침략하여 그들의 숙원이던, 16세기 말 임란 때 못다 한 조선정벌 사업을 20세기 초에 마무리한다. 그것이 일제식민통치이다. 서유구와 서씨 가문의 학문적 집대성이 바로 임원경제지이다. 그 내용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하더라도 250년의 거리가 있고 문물과 산업과 생활체계가 많이 바뀐 지금, 얼마나 현실에 맞게 재가공하고 재해석해내느냐가 한류의 새로운 아이콘으로 성패를 결정지을 것이다.

반계 유형원(1622∼1673), 성호 이익(1681∼1763)을 필두로 하여 담헌 홍대용(1731∼1783), 연암 박지원(1737∼1805), 초정 박제가(1750∼불명)로 이어지는 개혁과 실학의 움직임은 동아시아에서 뒤지지 않았으며, 일본의 명치유신(1889∼1912)보다도 50여년 앞섰으나 국력을 집중시키지 못함으로써 결국 일제로부터 식민을 당하게 된다. 오늘도 한·중·일 간의 문화경쟁은 계속되고 있다. 임원경제지가 250년 만에 한류의 빛으로 떠오르길 기대한다.

박정진 객원논설위원·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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