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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현칼럼] 나무 인형과 흙 인형이 다툰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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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4-12-18 21:17:15 수정 : 2014-12-18 21: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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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회 문건’ 파문이 1년 후에 번졌다면
대통령과 청와대는 치명적 타격 입었을 것
천만다행으로 여기고 전화위복 도모하길
이름만 대면 다 알 만한 여당 의원에게서 “천만다행”이란 소감을 들었다. 뭐가? 세계일보 보도로 불거진 ‘정윤회 국정개입 의혹’ 문건 파문이 그렇다는 얘기였다. 처음엔 실없는 농담인 줄 알았다. 여권에 다행일 까닭이 대체 뭐란 말인가.

생각 짧은 우민(愚民)에겐 조언이 요긴하게 쓰이는 법. 그는 상상을 해보라고 했다, 문건 보도가 1년 뒤늦게 터져 나왔을 경우를. 일차적 상황 전개는 뻔하다. 청와대는 화를 내고, 정치권은 발칵 뒤집힌다. 충격파를 키우는 추문은 줄을 이을 것이고. 급기야 박근혜 대통령이 ‘찌라시’ 때문에 나라가 흔들리는 현실을 개탄하게 될지도 모른다. 검찰은 어떨까. 국정 조사 영역의 사안을 수사 영역으로 가져오는 고소·고발 행태에 부글부글 끓으면서도, 실정법의 그물을 펴기 위해 안간힘을 쓸 개연성이 없지 않다. 과거 옷로비 사건 때 헛되게 그랬던 것처럼. 여기까지는 낡은 시쳇말로 ‘안 봐도 비디오’다. 현재 드라마도 그렇게 흘러가고 있고….

핵심은 그 후의 풍경이다. 2015년 말에 문건 파문이 돌출한다면 파문의 강도는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다. 2014년이 산들바람이라면 2015년은 초대형 태풍이다. 2016년 총선을 앞둔 민감한 시점이어서다. 청와대 안팎은 쑥대밭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 국정 추진력? 여당 공천권에 대한 영향력 행사? 꿈도 꾸기 어렵다. 여당은 청와대에 대놓고 등을 돌리거나, 멀찌감치 거리를 두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원망할 일도 아니다. 선거판 생리가 원래 그러니까. 최종 결과는 자명하다. 레임덕 태풍이 조기 부상해 2년 이상 휘몰아치게 되는 것이다. 2016년 이후, 청와대는 적막강산이다.

‘천만다행’ 화두를 던진 의원이 이렇게 자세히 설명해준 것은 아니다. 그는 “아무것도 못하게 됐을 것”이라고만 했다. 불친절하게도 주어마저 생략한 채로. 그래도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복잡한 여권 심경의 일단이 손금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지는 반전 가능성을 배제할 계제가 아니라고도 덩달아 믿게 됐다.

박 대통령의 소감은 뭘까. 정작 중요한 것은 이쪽이다. 박 대통령 역시 다행(천만다행이든, 불행 중 다행이든)으로 여기고 차제에 리더십을 손본다면 이번 파문은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수 있다. 물론 낙관만 앞세울 수는 없다. 대통령 인식이 ‘문건 유출=국기 문란’ 수준에 머물러 있는 중이라면 앞날은 캄캄할 테니까.

요즘 출퇴근길에 단국대 김원중 교수가 편역한 ‘사기선집’을 읽는다. 어제 본 것은 ‘맹상군 열전’이다. 진나라 소왕 초대에 응하겠다는 제나라 맹상군을 빈객 소대가 말리는 대목이 흥미롭다. 소대는 인형들의 말다툼을 엿들었다고 하면서 진나라행을 가로막는다. “나무 인형과 흙 인형이 서로 주고받는 말을 들었습니다. 나무 인형이 ‘하늘에서 비가 내리면 너는 허물어질 거야’라고 말하자 흙 인형이 ‘나는 원래 흙에서 태어났으니 허물어지면 흙으로 돌아가면 그뿐이지만 너는 어디까지 떠내려갈지 몰라’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승현 논설위원
논지는 명확했다. 맹상군이 호랑이같이 사나운 나라인 진나라에 갔다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흙 인형의 비웃음을 피하지 못할 것이란 쓴소리였다. 맹상군은 여행을 포기한다. 닭 울음소리와 개 짖는 소리로 진나라를 탈출하는 유명한 일화는 먼 훗날에 벌어진 일이다.

박 대통령의 청와대에선 직언이 어렵다는 말들이 많다. 쓴소리는 더 어려울 것이다. 소대 같은 인물이 주변에 없다는 뜻이다. 인의 장막이 있다는 뜻이다. 청와대는 달리 볼 것이다. 하지만 국민 다수가 그렇게 믿는 것은 정황 증거가 수북하기 때문이다. 손사래만 칠 일이 아니다. 지지층 붕괴를 암시하는 여론조사 추이 또한 심각히 받아들여야 한다.

언론 기능의 정상 작동으로 불거진 문건 파문은 다른 것일 수 없다. 한마디로, 천만다행이다. 더 늦기 전에 국정 개선을 기할 수 있게 됐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맹상군은 소대의 간언에 무모한 여행 계획을 접었다. 언론 비판과 감시는 곧 소대의 간언이다. 박 대통령은 어느 길로 갈 것인가. 길을 잘못 잡으면 대통령은 물론이고 국운과 민생도 어디까지 떠내려갈지 모른다. 혜안과 결단이 필요하다.

이승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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