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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십시일반의 시간, 김장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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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4-12-19 21:08:51 수정 : 2014-12-19 21: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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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가족 마음까지 함께 버무려져
일손 하나하나가 1년 양식 만들어
엄마는 올해도 어김없이 김장을 해서 보내셨다. 대구에서 서울로. 혼자서 그 무거운 걸 들고 우체국까지 가서 부쳤다 하신다. 친정에 갈 때마다 아버지는 딸년은 도둑년이라고. 왜 맨날 친정 것을 싸가지고 가냐고 뭐라 뭐라 하셨지만 정작 난 어떤 것도 싸가지고 가고 싶지 않았다. 순전히 엄마 탓이다. 서울에 다 있다고 말했지만 서울 사는 딸에게 굳이 먹을 것을 싸가지고 보내고 싶은 것이다. 그것을 끝까지 거부하는 것 또한 엄마의 마음을 저버리는 것 같아 난 못내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친정에 가면 아버지에게 잔소리를 들어야 하고 먹을 것을 싸는 엄마를 묵묵히 바라보아야만 한다. 아버지와 엄마의 엇박자와 같은 장단을 감당해야 하는 것도 나의 몫이리라.

김장철이 다가오면서 택배회사들은 김장특수를 누리고 있다. 소금절인 배추를 해남에서 각 지역으로 공수하느라, 친정엄마가 멀리 떨어진 딸에게 김장을 보내느라 택배기사는 더욱 바빠졌다. 이맘때만 되면 TV에서도 나눔문화의 상징으로 등장하는 것이 ‘김장하기’와 ‘연탄 나르기’다. 

김용희 평택대 교수·소설가
독거노인이나 사회 소외계층에게 김장김치를 나눠주는 것은 한국만이 있는 연례행사다. ‘김장문화’는 한국만이 있는 유일한 문화다. 지난해 12월 우리나라 김장문화가 유네스코 인류 무형유산으로 등재됐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유네스코에 등재된 것이 우리나라 음식인 ‘김치’가 아니라 ‘김장문화’라는 것이다. 김장문화란 무엇인가. 김장을 하기 위해 전국에 흩어져 있던 온 식구가 한자리로 모인다. 부모, 아들, 며느리, 딸, 사위 등 모두가 함께 고무장갑을 끼고 수십 포기 혹은 수백 포기에 가까운 김치를 담근다. 수백 포기의 배추를 씻은 뒤 굵은 소금을 뿌려 절인다. 아파트일 경우에는 욕실 욕조가 배추를 절이는 통이 되기도 한다. 배추가 7∼8시간 절여지는 동안 김치에 넣을 속을 만들기 시작한다. 고춧가루에 찹쌀풀, 액젓, 찧은 생강, 찧은 마늘 등을 넣고 개어놓은 것에 지방마다 갖가지 김치 속을 집어넣는다. 첫째 며느리가 무를 채 쓸고 있으면 둘째 며느리가 미나리와 갓을 다듬고 시누이가 쪽파를 씻는다. 김장을 맛나게 하기 위해 생새우나 굴을 집어넣기도 한다. 사위나 아들은 김장을 시원하게 하는 생새우를 준비하고 굴을 씻기도 한다. 그럴라치면 시어머니는 옆에서 벌써 된장을 풀어 커다란 솥에 돼지고기 수육을 삶기 시작한다. 고구마를 쪄서 김치를 얹어 먹는 것도 맛있지만 역시 김장철 김장에 따끈따끈한 수욕만 한 것도 없다.

유네스코에서 기념하고 싶었던 것은 ‘김치’라는 음식이 아니다. 이와 같은 과정. 흩어진 가족들이 모여 씻고 다듬고 썰고 재는 과정. 온 식구들이 다 함께 모여 떠들고 이야기하며 만들어가는 ‘김장김치 만드는 과정’인 것이다. 모든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는 공간과 시간을 기념하고 싶어한 것이다. 김장을 담그는 ‘과정’은 곧 ‘축제의 과정’이다. ‘사회통합의 과정’이다.

일상에서 울퉁불퉁하던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 며느리 사이인 동서 관계, 며느리와 시누이의 관계가 서로 뒤섞이고 버무려지는 시간이다. 울퉁불퉁하던 권력이 부드럽게 이완되는 시간이다. 1960년대 말 이어령 선생의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에서 선생은 한국 사람들은 가족끼리 즐기는 일이 거의 없다고 말하고 있다. 백일이니, 돌잔치니 모두 손님잔치다. 정작 가족끼리만 조용히 모여 즐기는 잔치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찌 보면 ‘김장 담그는 날’이야말로 가족들의 잔칫날이 아닐까.

‘나 혼자 산다’라는 TV 프로가 인기를 끌어가고 ‘나 홀로족’이 늘어나고 있다, 슈퍼에서는 바나나 한 개씩, 사과 한 개씩 포장한 상품이 날개 돋친 듯 팔린다는 뉴스다. 앞으로 ‘싱글족’은 더 늘어날 것이다.

‘십시일반’이란 말이 있다. 밥 한 술씩 퍼 담아 밥 한 그릇을 만들어내듯 이 겨울 식구들의 일손 하나하나가 1년의 양식을 만든다. 현대의 테크놀로지와 매스미디어를 벗어나 아날로그적으로 만나는 시간. ‘다 같이 만들고 다 같이 먹는’ 식구가 비로소 완성되는 시간, 김장철이다.

김용희 평택대 교수·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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