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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기보다 먼저 경청, 왕에겐 직언 서슴지않았던 조선 최장수 영의정 황희

입력 : 2014-12-19 19:54:42 수정 : 2014-12-19 19:5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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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무 지음/민음사/2만5000원
방촌 황희 평전/이성무 지음/민음사/2만5000원

황희는 ‘청백리’의 표상으로 여겨지지만 여러 가지 불미스러운 일에 연루됐던 인물이다. 대사헌 시절 금을 뇌물로 받아 ‘황금 대사헌’이란 별명을 얻었고, 사위의 죄를 면해 달라며 청탁을 넣었다 들통나기도 했다. 그에 대한 또 다른 이미지는 “너도 옳고, 너도 옳다” 하는 인자함이다. 역시 실제와는 괴리가 있다. 그는 “그른 것도 옳다 하고 옳은 것도 그르다고 한다면 어찌 폐단이 없겠냐”며 왕이 압박하던 정확한 판단력의 소유자였다.

많은 이야기들이 전하는 인물인지라 황희 하면 많이 연구되고, 정확하게 알려진 것 같지만 실상이 이렇다. 책은 조선 왕조의 최장수 영의정으로서 전방위에서 활약한 명재상 황희의 일생을 펼쳐보인다.

책은 ‘행정의 달인’ 황희에 주목한다. 그는 56년 관직에 있었고, 그중 24년간 재상직을 맡았으며 18년은 영의정을 지냈다.

이 시간은 조선이 건국된 뒤 태종, 세종을 거치면서 왕조의 기틀을 다지고, 전성기를 이끌던 때와 겹친다. 재상으로서 왕과 신하들 간의 의견을 조율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그래서 황희는 회의에서 절대 먼저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영의정이 말하면 다른 사람들은 더 이상 의견을 내지 않거나, 아부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황희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두루 듣고 마지막에 종합해 의견을 개진했다. 각종 정책의 완급을 조절하는 신중한 태도를 견지하면서도 의연함과 과단성을 발휘해 4군6진의 개척 같은 성과를 뒷받침한 것은 그래서 가능했다. 고려와 중국의 국가 제사 제도를 상고해 조선 고유의 제도로 정착시키고, 외교에서 명과의 미묘한 문제를 원만히 처리한 것도 황희였다.

저자는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등을 지낸 역사학계의 원로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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