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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쟁 소용돌이 속 한많은 인생… ‘나’란 누구인가 … ‘혜경궁 홍씨’
권좌에서 쫓겨난 왕… 권력이란 이토록 허망하구나 ‘리차드 2세’
임금의 며느리, 뒤주에 갇혀 죽은 세자의 아내, 임금의 늙은 어미로 살아온 여성에게 ‘나’란 무엇인가. 신에게 왕권을 부여받은 절대권력자가 권좌에서 쫓겨났을 때 마주하게 될 ‘나’는 누구인가. 국립극단이 연말에 준비한 연극 ‘혜경궁 홍씨’와 ‘리차드 2세’는 모두 인생의 한 굽이에서 자신과 마주하는 인물들을 그린다. 두 편 모두 역사극이다. 작품의 색채는 정반대다. ‘혜경궁 홍씨’가 에너지와 감정이 휘몰아치는 반면 ‘리차드 2세’는 시적이고 절제된 분위기를 유지한다. 연출가의 면면도 묵직하다. ‘혜경궁 홍씨’는 우리 연극계의 거장 이윤택이 극작과 연출을 맡았다. ‘리차드 2세’는 루마니아 대표 연출가 펠릭스 알렉사가 지휘했다.

“어디 보아도 내 것이 없구나, 내 이름이 없구나.”

환갑을 맞은 혜경궁은 아들 정조 앞에서 한탄한다. 눈물을 그렁그렁하며 은근슬쩍 외가의 억울함을 풀어줄 것을 호소한다. 아들이 외가의 허물을 들추자 일순 정색한다. 눈빛에 냉기가 감돈다. 천륜으로 맺어졌지만 권력의 줄다리기를 벌일 수밖에 없는 모자지간이다. 노회함을 빛내던 혜경궁은 지엄하게 진찬례를 받고 방에 들어오는 순간 필부필녀로 돌아온다. 가려움을 못 이겨 기둥에 대고 등을 벅벅 긁는다. 모두 한 여성의 몸에 공존하는 삶의 단면이다.

지난해에 이어 재공연하는 ‘혜경궁 홍씨’는 한바탕 정화의식을 치르는 듯한 작품이다. 괴팍한 권력자인 시아버지, 미쳐가다 뒤주에서 죽은 남편, 남편을 버리라는 친아버지, 자신을 원망하는 아들의 기억이 영겁의 세월처럼 혜경궁을 짓누르고 있다. 연극은 혜경궁이 과거와 화해하고 글쓰기를 통해 목소리를 찾기까지 하룻밤 심리를 따라간다. 단 하룻밤 사이에 벌어지는 일이지만 천둥이 진동하고 폭풍우가 휘몰아치듯 강렬한 파도가 무대를 쓸고 간다. 영조 일가의 괴상한 면모부터 사도세자의 광증까지 왕가의 역사는 혜경궁의 눈으로 재구성된다.

지난해에 이어 혜경궁으로 분한 김소희는 10살 소녀에서 61살 노인을 오가며 혼을 사르는 듯한 연기를 펼친다. 연극에는 현실과 초현실, 삶과 꿈이 공존한다. 시공간 변화는 회전하는 무대로 표현된다. 이윤택 연출답게 궁중무용, 씻김굿 등이 곳곳에 색을 입힌다. 28일까지 서울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공연한다. 1만∼3만원. 1688-5966

‘리차드 2세’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이지만 국내에서는 친숙하지 않다. 후기 사극 4부작 중 하나다. 중세 영국에서 플랜타지네트가의 마지막 왕 리차드 2세가 폐위되고 헨리 4세가 모반에 성공하는 사건을 그렸다. 사극이지만 역사적 사건보다 왕좌에서 쫓겨난 리차드 2세의 내면에 집중한다. 왕권신수설을 굳게 믿었던 왕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됐을 때 과연 무엇이 남는지 들여다본다.

극은 갑작스럽게 시작한다. 리차드 2세가 사촌인 헨리 볼링브루크를 추방하는 장면이 설명없이 던져진다. 리차드 2세는 이어 볼링브루크가 상속받을 영지를 빼앗아 아일랜드 원정 자금으로 쓰고, 쫓겨났던 볼링브루크는 반란을 일으켜 성공한다. 극 초반 변덕스럽고 철 없이 기묘하던 리차드 2세는 왕관을 빼앗긴 뒤부터 자기 성찰을 시작한다.

‘실패한 왕’ 리차드는 권좌에서 쫓겨난 뒤에야 고통스럽게 실존을 대면한다. 우유부단하고 어리석고 무자비하면서 섬세하고 감성적인 왕은 감옥에 갇히고서야 권력의 허상을 깨닫는다. 그는 “나는 이렇듯 홀로 여러 사람의 역할을 해보지만 누구도 만족스럽지 않구나… 내가 무엇이 되든, 나 자신이든 아니든, 인간인 이상 아무것에도 만족할 수 없을 거야.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편안해질 때까지는”이라고 토로한다.

무대는 시적이다. 듬성듬성 쌓인 자갈과 흙무더기는 좁은 무대를 광야로 변모시킨다. 궁정, 광야, 높은 성 같은 공간을 몇 개의 장치로 효과적으로 표현한다. 대사 역시 “복종을 배울 슬픔의 시간을 다오” 식으로 시적이고 문어체이며, 분량이 방대하다. 배경 지식이 없다면 여러 고유명사와 화려하고 긴 수식어를 따라가기가 숨이 찰 것이다. 연기마저 고전적, 정석적이다보니 쉽고 가볍게 즐길 만한 작품은 아니다. 리차드 2세는 김수현, 볼링브루크는 윤정섭이 연기한다. 28일까지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공연한다. 2만∼5만원. 1688-5966

송은아 기자 se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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