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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동서양 초월한 이 그림처럼 서로 다름 인정하면 조화로운 세상

입력 : 2015-01-20 20:57:32 수정 : 2015-01-20 20:5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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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완식의 화랑가 산책] 갤러리 AG 2월 25일까지 개시개비展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에 자리 잡은 갤러리AG에서 다소 난해한 제목의 전시가 열리고 있다. 전시제목이 ‘개시개비(皆是皆非)’다. 신라시대 고승 원효대사가 주창한 화엄사상의 핵심 키워드다. 어떤 입장도 전적으로 옳거나 전적으로 그른 것은 아니며, 각각의 주장이 부분적 진리성을 가지고 있다는 속뜻을 담고 있다. 지금 우리시대에 더욱 절실한 화두다.

굳이 쉽게 현실적으로 해석해 보자면 ‘보다 나은 내일과 미래를 위해 서로 화합해보자’는 메시지일 것이다. 독단이 설치는 시대에 다른 사람의 주장도 진리일 수 있음을 받아들이고 소통해야 한다는 뜻이 담겼다. 세상에 절대적인 진리란 없다. 이분법적 사고는 민주 사회를 저해하는 가장 큰 걸림돌이다. 다름을 인정하는 ‘화쟁(和爭)의 대화 철학’이 필요한 이유다.

덧붙이자면 원효대사가 주창한 화쟁 철학의 중심은 ‘원융회통(圓融會通)’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로 통한다’는 간단명료한 진리다. 올바른 화쟁 ‘논쟁(論爭)과 대화(對話)의 하모니’로 완성된다. 논쟁은 ‘내가 옳음을 입증하는 과정’이라면, 대화는 ‘상대방도 옳을 수 있음을 인정하는 과정’이다. 내 주장뿐 아니라 상대방의 의견도 수렴하는 경청을 통해 보다 성숙되고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 ‘개시개비(皆是皆非)’의 숨은 뜻인 셈이다.

부수적으로 동음인 개시(開始)나 개비(改備)와도 연결 지을 수 있다. ‘어떤 행동이나 일을 시작하다’와 ‘있던 것을 갈아 내고 다시 장만하다’라는 의미를 각각 지니고 있다. 이는 ‘새로이 시작한다’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따라서 ‘개시개비’에는 “전혀 다른 개념이나 이념이 만났어도 서로 존중하고 조화를 이루면 새로운 시작이 된다’는 속뜻도 포함하고 있다고 하겠다.

예술에서의 새로운 창조도 예외가 아니다. 2월25일까지 열리는 전시엔 박병춘(회화장르·위 사진)과 이이남(미디어장르·아래 사진)이 초대됐다. ‘서로 다른 상반되거나 상충되는 개념을 한 작품에서 창의적으로 조화시켜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낸다’는 공통점에 주목하고 있다. 특히 한 전시공간에서 동양과 서양의 감성을 넘나드는 평면과 미디어 작품들의 만남으로 전혀 색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박병춘은 동양의 공간개념과 정신세계를 근간으로 서양의 현대적 조형기법을 혼용한다. 이이남은 2차원의 동서양 명화를 3차원의 시공간으로 재해석한 영상에 음향까지 어우러지게 하고 있다.

박병춘은 한국화 장르의 대표적인 이단아로 꼽힌다. 하지만 그만큼 ‘진정한 한국성’에 깊은 천착을 보인 작가도 드물다. 그는 주로 농묵의 갈필(渴筆)로 과감하게 윤곽선을 잡은 후 여러 단계의 채색과정을 거쳐 완성한다. 수묵이 기본을 이루되 가미되는 재료는 목탄, 콘테, 파스텔, 아크릴물감, 혼합재료 등 특별히 얽매이지 않았다. 바로 라면산수, 고무산수, 칠판산수, 봉지산수 등이 그것이다. 

이이남은 ‘2차원과 3차원이 교차하는 신개념 미디어 캔버스’를 만들어 주목을 받고 있는 작가다. 그는 2차원 평면에서 완성된 회화작품을 근간으로 시간성과 공간성을 가미해 전혀 다른 3차원적 영상장면으로 탈바꿈시킨다. 이 과정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소재가 동서양 명화들이다.

창조는 하늘에 떠 있는 별 같은 존재가 아니다. 가까운 일상에서부터 서로 다름이 존중될 때, 제각각의 객체가 만나 이상적이고 발전적인 에너지를 발산할 수 있을 때 창조가 이뤄진다. 창조경제의 환경도 그래야 할 것이다.

편완식 미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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