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굴로부터 문명의 진화 시작 돼
상가·전철 등 들어선 생활공간으로
기술이 발달한 오늘날 지하공간은 다양한 시설이 들어서며 지상과 지하가 하나의 생활권으로 통합되는 흐름을 보여준다.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은 지하를 문화공간으로 활용한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글항아리 제공 |
김재성 지음/글항아리/2만5000원 |
2011년 경기도 광명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금관 5중주가 열린 공연장은 독특하다. 특별한 무대장치라 할 것이 전혀 없고 연주자들 주변은 흙과 돌뿐이다. 공연장은 1912년부터 60여년간 은을 채굴했던 폐광. 공연장의 이름은 ‘광명 케이번(cavern·동굴) 월드’다. 오랜 세월 인간의 탄생과 연관된 신화적 배경을 지닌 동굴은 심리적 안정감을 준다. 광명 케이번 월드는 지하공간이 생활문화 공간으로 조성된 한 사례다.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 지하 전시장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례다. 많은 관광객을 효과적으로 수용할 방법을 고민하던 박물관은 중앙 정원 하부를 파내고 지하와 지상을 연계하는 공간구조를 완성했다. 지하공간을 만들면서 유서 깊은 지상의 건물을 손대지 않는 개축이 가능했다. 루브르 광장의 유명한 유리 피라미드는 지하층과 지상 정원을 연계하는 통로의 기능을 한다.
지하는 이미 어둡고, 음습하며, 불길한 공간이 아니다. 땅 밑으로 전철이 다니고, 커다란 상가가 자리했으며 문화공간이 수도 없이 생겼다. “땅을 파는 지혜가 고도화된 오늘날”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생각해보면 지하공간은 인류 생존의 조건이었고, 문명의 절정에 대한 증거였으며 문화권 통합·확대의 통로였다.
선사시대의 지하공간, 즉 동굴은 “쉼 없이 변화하는 외부세계와 구별되는 정적인 세계”로서 인류 생존의 배경이 됐다. 적의 공격을 피하기 좋은 곳, 비바람을 막아주며 먹을 것을 저장해 놓고 불을 지필 수 있는 동굴에서 비로소 문명은 진화하기 시작했다. 선사인의 가장 뚜렷한 흔적인 벽화가 동굴에 남아 있는 건 당연한 일처럼 보인다.
고대 페트라 문명의 위대함을 증언하는 알카즈네는 사막 지역의 사암을 깎고, 파들어가는 방식으로 만들었다. |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땅을 파는 도구, 기술은 발전했고 과거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실패했던 시도가 현실화돼 큰 파장을 낳기도 했다. 알프스 산맥을 관통하는 터널 공사가 대표적이다. 알프스는 선사시대부터 산맥의 위, 아래를 두 개의 문화권으로 나누는 거대한 단절의 벽이었다. 이 단절을 허문 것이 터널이었다. 19세기 터널이 만들어진 이후 유럽 남북 간의 교류가 활발해졌고, 100여년 지난 뒤에는 명실공히 하나의 문화권으로 재편되었다.
60여년간 은을 채굴하던 폐광을 활용해 만든 공간에서 연주회가 열리고 있다. 지하는 정적인 안정감을 주는 생활공간으로 개념이 확장되고 있다. |
문명사에서 지하공간의 의미라는 흥미로운 주제를 책으로 풀어낸 저자는 지반공학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전문가다. 여기에 “수십년간 연중 한달을 독서를 위한 안식월로 정해 인문사회과학 도서를 독파”하며 쌓아 온 지식을 더했다. 지하공간에 대한 전문적 지식과 인문적 성찰이 적절히 버무러져 책을 읽는 재미가 쏠쏠하고, 내용에 신뢰가 간다. 미래 지하공간에 대한 저자의 전망은 이렇다.
“지금까지 지하공간을 계획하고 개발하는 핵심은 ‘지상과 다르지 않은 지하’를 구축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앞으로 지하공간은 지상에 대한 추구보다는 지하공간 자체의 장점을 부각시키는 방항으로 나아갈 것으로 보인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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