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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순열의경제수첩] 뻔한 거짓말, ‘증세 없는 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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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01-23 21:07:08 수정 : 2015-01-23 21:3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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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급쟁이 지갑만 터는 편법증세 꼼수
이미 형평성 상실 누가 동의 하겠나
개혁은 보수 정권의 몫이어야 한다. 실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적어도 최후의 분단국 대한민국에서는 그렇다. 진보세력의 개혁은 이념의 덫에 걸려들기 십상이다. 자칭 보수가 쳐놓은 ‘빨갱이 프레임’에 갇혀 추진력을 잃고 만다. 개혁은 좌초하고 갈등의 상처만 깊어진다. 개혁이 보수의 전유물이어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냉전적 사고가 여전한 한국사회 수준을 감안한 현실론일 뿐이다.

역대 정권에 사례는 널렸다. 전두환 군부정권의 바통을 이어받은 노태우정부의 정책들은 깜짝 놀랄 만큼 진보적이었다. 토지공개념을 법제화하고 북방외교를 펼쳤는데 모두 이념의 덫에 걸리기 딱 좋은 정책들이었다. 특히 토지공개념은 기득권층의 이해와 충돌하는 것이었다. 땅에 투자해 불로소득으로 부자가 되는 것을 막겠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시장경제의 기본질서를 훼손할 위험이 있다는 점에서 위헌 소지도 안고 있었다.

그럼에도 노태우정부는 꿋꿋하게 밀어붙였다. 이념의 굴레에서 자유로운 보수정권이었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물론 개혁의지도 충만했다.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이던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는 “부동산값 상승이 불평등 심화, 국민생활 빈곤화의 근본원인이라고 보고 이 제도의 도입 필요성을 누차 말씀드렸다”고 회고했다. 부동산이나 금융자산에서 얻는 불로소득이 땀 흘려 벌어들이는 임금을 늘 앞질러 불평등이 심해진다는 피케티의 통찰과 똑같다. 이미 그 시절 보수정권이 가장 진보적 어젠다를 고민하고 추진했던 것이다.

이런 진보적 정책을 진보 정권이 추진했다면 어땠을까. 결과는 딴판이었을 것이다. 무장공비가 동해안에 침투한 와중에도 장관이 새벽길을 달려 평양에서 북측 인사를 만나는 일도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북방외교를 기획하고 집행한 박철언 전 장관은 “어떤 상황에서도 남북 간 대화는 계속돼야 한다”며 필자에게 비화를 소개한 적이 있다.

이런 이유로 개혁은 보수정권이 상대적으로 유리한 법인데도 작금 박근혜정부의 개혁은 꼬이고 엉키고 뒤죽박죽이다. 총론은 정확히 뭔지 모호하고 각론은 이리저리 충돌하며 부서지는 형국이다. 대선공약이자 국정방향의 총론이던 ‘경제민주화’가 사라지고, ‘증세 없는 복지’ 공약이 손쉬운 편법 증세라는 꼼수만 낳고 있는 탓이다.

류순열 선임기자
부작용은 자못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 ‘민란’이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조세저항의 민심이 거칠다. 세금 더 내라는데 좋아할 사람은 없겠지만 내용이 크게 문제라고 보기는 어렵다. 연말정산을 소득공제에서 세액공제 방식으로 바꿔 고소득일수록 더 내고 저소득자는 덜 내도록 한 것은 마땅한 일이다. 조세를 통한 소득재분배 기능은 강화될 것이다.

진짜 문제는 형평성을 잃은 편법 증세라고 본다. 감면혜택을 받고 있는 법인세는 놔두고 민감한 종교인 과세도 사실상 포기하면서, 국민건강을 명분으로 담뱃세를 인상하고 월급쟁이 유리지갑만 훑는 증세 방식에 누가 동의하겠는가. 엉뚱하게도 담뱃세 인상은 국민건강을 지키기보다 외국계 담배회사만 키워주는 꼴이 될 조짐이다. 외국계 업체들이 저가담배로 공세수위를 높이면서 담배주권이 위협받는 상황이라는 업계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런 마당에 박 대통령의 복심이라는 이정현 최고위원은 세목, 세율을 늘리거나 높인 게 아니라서 증세가 아니라는 말장난으로 불난 집에 부채질까지 하고 있다.

사실 이 모든 혼란은 진작에 예고된 것이다. 2012년 대선 당시 ‘예고편’이 생중계됐다. “증세하지 않고 어떻게 복지재원을 충당합니까. 그게 가능합니까?”(문재인 민주당 후보) “그러니까 제가 대통령 하겠다는 거 아니겠어요?”(박근혜 새누리당 후보) ‘증세 없는 복지’, 그 뻔한 거짓말이 증세를 증세라 부르지 못하는 비겁한 정부를 만들고 대한민국을 혼란으로 몰아넣고 있다.

류순열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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