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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문호 "사진은 못버려…미쳐야 사는 재미가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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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01-26 21:05:21 수정 : 2015-01-26 21: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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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완식이 만난 사람] 인사동 사진가 조문호
"모든 걸 버려도 사진은 못버려… 미쳐야 사는 재미가 있지"
서울 인사동 밤거리는 여전히 술과 예술, 낭만이 버무려지는 공간이다. 30년 넘게 그 언저리를 서성이며 카메라 셔터를 눌러온 인사동 사진가 조문호(68)에게 늦은 밤 술 취한 예술가들의 모습은 더없는 사냥감이다. 그럴려면 같이 취하고 동화돼야 한다. 그의 카메라가 늘상 막걸리로 얼룩져 있는 이유다. 모든 것을 내려 놓고 풀어젖힌 모습에서 인간을 끄집어 내기 위해 그는 결코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한바탕 탈춤을 벌인 후 탈을 벗어던진 찰나다. 이를 위해 그의 카메라는 늘상 정조준 상태다.

이따금 그가 전시공간 문앞이나 막걸리 집에서 만취상태로 잠들어 있는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그럴 땐 짓궂게 그를 흔들어 깨우게 된다. 늘상 놀란 보초병처럼 반사적으로 총을 겨누듯 카메라를 들이대는 모습이 보고 싶어서다. 카메라를 연인처럼 꼭 껴안고 잠든 모습은 인형을 품에 안고 자는 어린아이 같기도 하다.

“종로경찰서에도 자주 끌려갔지. 사진을 찍다 보면 종종 지나는 행인들과 시비가 붙기도 해. 사우나에서 찍다가 경찰관이 들이닥치기도 했었어. 사진작업에 숱한 고난이 따르지만 나는 그 짓을 포기하지 못해. 아무리 이미지 홍수시대에 산다지만 세월이 한참 지나면 오늘의 작업이 보석처럼 빛날 것을 믿기 때문이야. 그게 바로 역사 아닌가.”

2010년 발간된 그의 사진집 ‘인사동 이야기’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무엇보다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은 천상병 시인이 죽치고 있었던 ‘귀천’을 비롯하여 벗들과 어울려 마음껏 취할 수 있었던 주막 ‘실비집’이다. 그곳에서 천상병 시인을 비롯하여 민병산 선생, 박이엽 선생, 채현국 선생, 최규일 선생 등 많은 분들을 만난 정신적 허기를 메울 수 있었다.

그는 인사동에 드나들며 우연히 많은 벗들도 만나게 된다. 부산에서 상경했던 서양화가 최울가와 박광호, 노동자 시인 김신용, 지금은 고인이 된 서양화가 이존수와 사진가 김영수까지 말벗이 돼 주었다. 사진기자 김종구, 서양화가 이청운· 강용대, 시인 최영해· 최정자, 소설가 배평모, 도예가 김용문 등과 어울려 밤새 술 마시며 인생과 예술을 논할 수도 있었다.

1984년 인사동 포장마차에서. 좌로부터 시인 김신용, 조문호, 소설가 배평모.
그에게 인사동은 고향 같은 존재다. 사람이 살다 지치거나, 외롭고 피폐해지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게 고향 아닌가. 그곳엔 정겨운 골목들이 있고, 마음이 통하는 예술가들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인사동에는 사진협회가 보금자리를 튼 예총회관도 있었고, 사진하는 친구들만 모이던 ‘꽃나라’ 흑백연구소도 있었다.

“사진은 내겐 숙명 같은 것이여. 모든 걸 버려도 사진은 버릴 수가 없었어. 사진과 함께한 지난 세월을 돌아보니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았던 것 같아. 사진 기록물은 남았으나 내 스스로의 삶은 만신창이가 되어버렸어.”

그는 청년시절 연극영화학도를 꿈꿨다. 무작정 상경해 책 외판원까지 하며 뜻을 관철하려 했지만 집안의 반대로 결국 무산된다. 국문학과에 입학을 했지만 중도에 그만두고 농협에 입사하게 된다. 부산농협과 김해농협을 거쳐 고향인 창녕농협에서 근무했다.

“마음에도 없는 직장에서 일하는 것이 지겨워 문 닫은 정미소를 개조해 무료 음악실을 열었어. 부산 친구들이 주말에 찾아 왔지. 퇴근 후 음악실에서 보내는 것이 당시 나에게 유일한 위안이었지.”

그는 얼마 후 농협에 사표를 내고 부산으로 간다. 부친도 모르게 야반도주를 했다. 친구들과 어울려 ‘하늘목장’이란 음악실을 운영하며 자유로운 삶을 구가했다. 하지만 그런 생활도 오래가지 못했다. 후두암으로 고생하던 부친이 사람 만들겠다고 결혼을 서둘렀다.

지난해 인사동 양반집 앞에 함께한 ‘사진가모임’. 좌로부터 육명심, 유병용, 이기명, 이완교, 이명동, 조문호, 한정식, 구자효.
“내가 속을 섞여 병을 얻으신 것 같은 죄책감에 마지막 효도하는 심정으로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하게 됐어. 그러나 그것은 큰 실수였어. 음악실 아래에 신방을 차렸으나 밤늦게까지 친구들과 어울려 음악에 빠져 있으니 여자가 좋아하겠나.”

종국에 그는 음악실을 부산 남포동으로 옮기게 된다. ‘한마당’이란 국악전문 학사주점으로 탈바꿈시켰다. 동아대 학생들이 주 고객으로 형성된 ‘한마당’은 손님들로 미어 터졌다.

“어느 날 단골 손님 중의 한 분인 사진작가 최민식 선생으로부터 ‘휴먼’이란 사진집 한 권을 선물로 받게 됐어. 백 마디 말보다 한 장의 사진이 주는 호소력에 반하게 됐지. 내가 사진으로 인생행로를 정하게 된 순간이었지.”

그는 장사는 종업원에게 맡기고, 허구한 날 카메라를 메고 떠돌아다녔다. 그러면서 주점 손님들이 줄게 되고 3년 만에 가게를 정리하게 된다. 부산 서면에 돈을 빌려 ‘이별의 부산정거장’이란 주점을 다시 차렸지만 손님이 없어 1년쯤 버티다가 파산한다. 주점 이름처럼 서울로 야반도주하면서 부산과 이별을 했다. 거지꼴로 상경을 했지만 사진만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은 부풀었다.

그의 아내는 생활고로 그의 곁을 떠났다. 하필이면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던 날 아내는 짐을 쌌다. 그때, 다섯 살이던 아들이 헤어지기 싫어 처마 밑에 서서 울던 모습은 영영 잊을 수 없는 일로 그의 가슴에 대못이 됐다.

“사람을 위한 인본주의 다큐사진을 찍는다면서 사랑하는 자식을 떠나 보내야 하는 아픔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이건 정말 아이러니야.”

그는 ‘한국환경사진가회’를 결성해 회장을 맡으면서 ‘우포늪’ 탐사기록에 이어 ‘동강’ 탐사기록에 참여했다. 아예 강원도 정선에 둥지를 틀고 ‘두메산골 사람들’ 사진집을 내기도 했다. 그는 두 번의 이혼 후에 지금은 장터 사진가 정영신과 살고 있다. 자유구가를 위한 도피와 이혼이 반복되는 고난의 삶이었다. 그는 요즘 아내와 전국 장터를 떠돌고 있다. 

그는 요즘도 시간이 허락하면 인사동에 얼굴을 내민다. 사실 그도 인사동 기인 중에 한 사람이다. 천상병 시인이 그랬고 중광 스님도 그랬다. 낭만과 자유, 그리고 순수의 열정이 너무 강했던 이들이다.

“기인이라고 기이한 행동만 일삼는 비사회적인 사람은 아니야. 일상적인 삶의 틀에서 벗어나고 싶은, 늘 일상 너머의 세상을 꿈꾸는 낭만적인 사람들이지.’

현실의 질서에서 벗어나 새로움을 찾아 나선다는 것은 항상 외로움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 외로움을 덜 타려는 별난 행동들이 일반인들의 눈에는 기인으로 여겨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기인이란 말 뒤에는 미쳤다는 뜻도 숨겨져 있을 것이다. “비록 미친 사람처럼 보이는 것과 미친 사람 사이의 그 경계를 지킬 수 없을지라도 미치고 또 미치고자 한다. 그래야 사는 재미가 있지 않는가.” 그의 말이 가슴을 깊게 파고 든다.

편완식 미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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