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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치작업은 공간과의 대화… 작업하며 성찰 더 깊어지죠”

입력 : 2015-02-09 21:35:20 수정 : 2015-02-09 21:3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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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완식이 만난 사람] 미술계 주목 받는 작가 애나 한 너무 할 것이 많아 고민이다. 하지만 그것을 해낼 만한 마땅한 작업공간은 없다. 자꾸만 엄습해 오는 것은 당장 뭘 해서 먹고살지 하는 걱정거리들이다. 그렇다고 이 길을 포기할 수도 없다. 중학교 시절부터 예고 진학을 위해 그림과 씨름해 오지 않았는가. 나이 30이 넘도록 해온 것들을 이제 와서 버린다는 것은 ‘나’라는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예술가의 길은 그렇게 숙명처럼 자리 잡아 가고 있다. 지난 일요일 저녁 서울 신림역 근처에서 만난 작가 애나 한(33)이 쏟아 놓은 말들이다.

나름의 화법으로 ‘공간의 판타지’를 엮어내 미술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그는 최근 신림동에 몸을 기탁할 작은 공간을 구했다. 거주와 작업을 병행하기엔 옹색하지만 감지덕지하게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지난 10여년간을 거의 떠돌이처럼 살아왔기 때문이다.

“10년의 미국 유학생 시절엔 기숙사와 홈스테이를 전전했어요. 귀국 후 지금까지 4년여도 4개월마다 이사짐을 싸야 했습니다. 창작스튜디오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해 한국과 독일을 오가기도 했지요. 그러면서 저만의 공간에 대한 애착과 갈망이 생겼습니다.”

그는 익숙해진 공간에서 짐을 정리해 나오거나 새로운 공간으로 짐을 들고 들어갈 때의 디테일한 감성을 주워 담기 시작했다.

영감에만 의지하지 않고 건축적 공간 개념까지 수용해 판타지를 엮어내고 있은 애나 한 작가. 그는 올 들어 색다른 공간감과 색감으로 주목을 받으면서 30대 작가군의 간판스타로 부각되고 있다.
“짐을 들고 떠나면서 바라본 텅빈 공간의 느낌은 연인과의 이별 같은 것이었어요. 그곳과 함께했던 삶도 신기루처럼 피어올랐습니다. 지나온 것들 모두가 판타지가 됐어요.”

새로운 공간들도 짐을 들여놓는 순간 이내 익숙해 삶으로 스며들었다. 일상이 어느 순간부터 판타지가 됐다.

“삭막한 현실에 마술상자를 들여다볼 수 있는 바늘구멍 하나를 뚫어놓는 일이 제 작업이란 생각을 하게 됐어요. 절실한 현실이 제게 준 선물 같아요.”

그는 전시 공간이나, 살기 위해서 들어간 공간이나, 새로이 마주하는 수많은 운명적 공간들이 그에게 무엇을 말하려는가에 귀를 기울인다.

“제가 상대가 돼주면 공간들은 말을 걸어 와요. 그런 대화의 결과물이 작품이 됩니다.”그는 자신의 작품을 ‘나의 집’이라 했다. 집에 짐을 들여놓듯 그는 전시장에 설치작업을 한다. 그것을 평면 회화작업으로도 풀어내고 있다. 그렇다고 그가 감성적 요소에만 매달리는 것은 아니다. 건축의 공간 개념을 이론적으로 흡수하고 있다. 형식과 내용의 충실함을 위해서다. 현대 건축에 큰 공헌을 한 스위스 태생의 프랑스 건축가 르코르뷔지에(Le Corbusier, 1887∼1965)의 공간에 대한 천착을 떠올리게 한다.

색, 빛의 어우러짐을 통해 공간의 판타지를 연출한 설치 작품 ‘패러덕스 허들 (Paradoxical Huddle)’.
“‘건축은 살아있는 기계’라고 일갈했던 르코르뷔지에는 건축물에 휴머니즘을 불어넣은 인물이에요. 예술과 인간애를 지향한 그의 ‘감동을 위한 건축’은 제 작업에 멘토가 되고 있습니다.”

건축을 ‘인간과 자연을 위한 드라마이자 시(詩)’로 여겼던 르코르뷔지에의 건축관은 그의 작업과도 많이 닮아 있다.

그는 미국 대학원 시절에 학교에서 썼던 넓은 작업공간을 빼고는 늘 협소함에 순응해야 했다. 회화를 전공한 그가 설치작업을 먼저 선보인 것도 그릴 공간이 마땅치 않아서다.

“전시장에 걸 만한 크기의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공간이 없었어요. 자연스럽게 전시장에서 즉석으로 펼쳐낼 수 있는 설치작업을 할 수밖에 없었지요.”

여전히 그의 작업실은 탁자 하나가 공간 전부를 차지하고 있다. 바닥에 엎드리거나 쭈그려 앉아서 작은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다. 최악의 조건이지만 그는 그 속에서 공간에 대한 성찰이 되려 깊어진다고 했다.

“르코르뷔지에는 몇 평 안 되는 비좁은 자신만을 위한 오두막에서 책상, 침대, 세면대, 거울 등을 한 치도 버리는 공간 없이 짜맞추었어요. 인체에 가장 밀착된 디자인을 탄생시켰던 것이지요. 그것이 협소함을 돌파하는 공간의 판타지입니다.”

그는 마치 축구선수가 밀집 수비공간을 헤쳐 나가듯 공간을 안무한다. 그의 그림과 설치작업이 다이내믹하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공간이라 경험되는 장소는 신체로서의 경험을 통해 이해할수 있다’는 일본의 유명 거축가 안도 다다오의 말을 늘 곱씹게 됩니다. 커다란 평면 작품의 ‘공간’으로 우리를 압도하는 바넷뉴먼도 일찍이 이를 알았을 거예요.”

그는 자신의 작업을 통해 관객이 새로운 공간을 경험하게 하려 한다. 색도 공간을 먼저 떠올려 보고 그것에 합당한 색을 나름 선택한다. 감성적 코드에 가깝다.

“색은 친숙하지 못한 공간에 느낌을 부여하는 역할을 해요. 원색은 공간을 나누고 드러내는 데 효과적이지요.”

특히 그가 즐겨 쓰는 것은 보라색이다. 그럼에도 현실공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색은 아니다.

“보라색 자체는 친숙한 색임에도 자연적이지 않아 미스터리 한 느낌을 줘요. 제겐 현실과 동떨어진 다른 세계의 느낌으로 다가오는 색이에요.”

그는 색 사용에 대해서 국내 작가들과는 뭔지 모르게 다르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다. 이는 그가 일찍이 유학을 택한 이유와도 맥을 같이 한다.

“입시 위주로 단련되고 엄청난 노력이 투입되는 환경이 싫었어요. 한창 자유롭게 창의력을 키워야 할 시기에 어떤 틀에 갇힌다는 것은 불행이라고 생각한 거지요.”

그는 이런 요소들이 현대미술로 나아가는 데 장애가 되고 있다고 나름 판단하고 있다. 어렵게 터득한 것은 쉽게 버릴 수 없으니 자연스럽게 입시교육에서 익힌 테크닉에 매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테크닉은 어디까지나 도구에 불과합니다.”

그는 요즘도 다양한 실험을 하고 있다. 특정 유형의 작품으로 이름을 알리려는 성급함도 없다. 주위에선 전략적으로 승부수를 던지라고 하지만 아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는 지금 여러 갈래의 가늘고 긴 실타래를 만들어 가고 있다. 어느 시점에선가 굵고 긴 동아줄을 만들기 위해서다.

“한 가지 패턴으로 작업을 하라고 조언을 많이 받아요. 물론 이해는 하지만 예술은 단거리 게임이 아니에요.” 그는 먼 훗날 나름의 큰 흐름이 보이는 작업을 했노라고 회고를 하고 싶다고 했다. 대가의 반열에 오른 그의 이름을 기대해 본다.

편완식 미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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