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활한 우주, 어머니 자궁 속에 들어온 듯한 느낌을 주는 블루 단색화 작품 ‘블루 엔 드림’ |
실제로 블루는 근원이나 탄생을 상징한다. 용기나 희망, 비물질적이고 비현실적인 것을 은유하는 색이기도 하다. 정신성이 강하다는 얘기다.
“블루와 씨름을 하다 보면 꿈속에서 동틀녘 지평선을 바라보고 있는 저 자신을 보게 됩니다. 심신이 편안한 상태로 안정되는 경험도 하게 되지요. 요즘 흔한 말로 힐링의 색이란 걸 몸으로 느껴요.”
그는 동서양의 회화 코드를 잘 융합해 새로운 창조를 시도하고 있는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동서양의 상충되는 화법을 한 작품에서 창의적으로 조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서구 평론가들로부터 동양의 필선과 정신세계를 근간으로 서양의 현대적 조형기법까지 아우르면서 색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킨다는 얘기들을 많이 들어요. 여러 겹의 서양화적 채색 두께 속에서 어렴풋하게 우러나오는 일획의 필선들이 마치 4차원의 지문 같다고들 하지요.”
최근 들어 세계 미술계가 한국 단색화에 눈독을 들이는 것도 동양적 정신성에 있다. 실제로 미술시장에서도 단색화 바람이 거세다.
그의 작업실은 우면산이 바라다 보이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작업실 창문을 열면 우면산의 생기가 얼굴을 빼꼼 들이밀 정도다.
“늘 하루를 시작케 해주는 힘이지요. 어느날부터인가 그 생기가 화폭에 뛰어들기 시작했어요.” 그의 작품은 색과 선들의 놀이터다. 다양한 톤의 단색조들이 저마다의 옷을 입고 뽐내는 형국이다. 선들은 옷 매무새처럼 색의 각을 세워 준다. 색은 칠해지는 것이 아니라 입혀지고 선으로 맵시를 낼 뿐이다.
“색들은 우면산의 터럭이라 할 수 있는 초목과, 살이라 할 수 있는 흙의 아우라예요. 흙의 살 속 깊은 곳엔 보석 같은 생명의 기운들이 가득할 겁니다. 저는 그저 그런 지기(地氣)를 받아 쓰기할 뿐이죠.”
그의 단색화가 요즘 들어 더욱 화려해지고 있다. 솜뭉치 같은 핑크와 레드가 화폭을 물들이기도 한다. 원색의 단색화를 극단으로 몰고 가고 있는 것이다.
“단색조의 화려함은 산이 내게 내린 선물이에요. 산이 내게 은밀한 내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요.”
그의 화폭엔 어느 시점부터인가 어렴풋한 것들이 꿈틀거리고 있다. 형상을 향한 선들의 떨림이다. 생명이 형상화되고 있는 모습이다.
“모든 것을 내줘 저의 눈을 열게 해준 만사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교감의 미학이다. 조형적으론 형상과 추상이 한데 어우러지고, 색을 덕지덕지 덧칠하는 서양의 유화 전통과 선의 미학이 중시되는 동양화가 한데 용해되고 있다. 대자연 앞에서 동서양화의 다른 화법조차 하나가 된 것이다. 본래의 세계다.
“어느 날 산이 주는 색을 따라가다 보니 제가 어느 틈엔가 알 수 없는 어딘가에 이르고 있었어요. 처음엔 드넓은 바다라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이내 무한 공간이란 인식을 하게 됐어요.”
김가범 작가는 “우리가 사물을 인식하는 것은 빛이 만들어 내는 색이 있기 때문”이라며 “같은 맥락에서 블루를 통해 또 다른 세계를 인식하는 통로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
그는 중년의 나이에 미국으로 현대미술 공부를 떠났다.
“어느 겨울날 저는 눈을 흠뻑 맞으며 길을 걷고 있었어요. 불현듯 제가 저의 삶에 주인이었는지를 눈 발자국 수를 세듯 꼽씹어 보게 됐어요. 그러지 못했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제가 저의 삶의 주인이고자 선택한 길이 유학이었습니다.”
그의 소망은 이제 죽어가는 순간까지 붓을 잡고 있는 것이다. 설치음악가 김희철씨가 그를 위해 ‘블루 엔 드림’이란 색소폰 곡을 썼다. 그의 인생이 블루다.
편완식 미술전문기자 wansi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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