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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현칼럼] 항소심은 왜 ‘공격’의 공으로 봤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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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02-12 21:04:58 수정 : 2015-02-12 21:0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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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법 위반 혐의 놓고 유무죄로 갈린 1·2심
자유심증주의 규정이 오남용 되는 건 아닌지 사법부는 되돌아봐야
인간은 매순간 선택의 갈림길에 놓인다. 하다 못해 샐러리맨의 점심식사도 그렇다. 뭘 고르느냐에 따라 오후의 몸 상태와 기분이 달라지게 마련이다. 선택, 신중히 고민할 일이다. 하지만 판사 같은 직업에 수반되는 고민의 무게에 견주면 점심 고민은 깃털보다 가볍다.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에 유죄를 선고한 항소심 판결이 화제다. 1, 2심 선택은 정반대였다. 1심은 무죄로 본 반면, 항소심은 징역 3년 선고에 법정구속까지 했다. 1심 이후 새 물증이 나온 것은 아니다. 항소심이 검찰 자료 증거력을 폭넓게 인정했을 따름이다. 형사소송법의 ‘자유심증주의’ 규정에 따른 결과라고는 해도, 사회적 논란은 피하기 어렵다. 1심 판결도 그렇지만, 항소심 판결 또한 논쟁적 선택인 셈이다.

항소심은 ‘논어’ 위정편의 ‘공호이단 사해야이(攻乎異端 斯害也已)’를 인용했다. 10일자 세계일보 보도에 따르면 재판장은 이를 들어 “나와 다른 생각에 대해 공격한다면 손해가 될 뿐”이라며 원 전 원장을 꾸짖었다. 상징적이고 시사적이다. 항소심이 택한 어록 자체가 누대에 걸쳐 해석상 분쟁을 부른 까닭이다. 재판부는 왜 그렇게 인용했을까. 공호이단의 공을 공격(攻擊)의 공으로 봤기에 그랬을 것이다.

주자와 정자는 달리 봤다. 김동인 박사가 번역한 ‘논어집주대전’에는 ‘공(攻) 전치야(專治也)’라는 해설이 나온다. ‘공은 연구한다는 뜻’이란 해설이다. 전공(專攻)의 공인 것이다. 집주대전은 그래서 “이단을 연구하면 해로울 뿐”이라고 옮긴다. 여기서 이단은 노자, 묵자, 불교 등의 가르침을 가리킨다는 것이 정설이다.

집주대전만인가. 전통문화연구회 문고판 등도 ‘이단을 전공하면 해로울 뿐’이라고 풀이한다. 그 나름의 컨센서스가 있는 것이다. 주자에게 ‘이단을 공격할 필요는 없다’고 해도 되지 않느냐고 물은 후학이 있긴 하다. 주자는 쐐기를 박았다. 이단의 해악은 바로잡아야 한다고. 그렇다면, 공을 공격의 공으로 보는 것은 금물이다. 뒤에 나오는 해(害)도, 문장 전체도 이상해지기 때문이다.

항소심이 오역을 했다는 것은 아니다. 이견도 분명히 있다. ‘논어집해’를 낸 중국학자 청수더는 공을 공격의 공으로, 이단을 군자가 행하지 않는 소도(小道)로 풀이했다. 그러면 ‘소도를 공격하는 것은 해롭다’는 뜻이 된다. 베이징대 리링 교수 또한 ‘집 잃은 개’에서 그렇게 해석했다. 영국 런던대의 버나드 퓨어러 교수도 유사하게 풀이한다. 하지만, 문제는 남는다. 재판부가 왜 ‘옳네, 그르네’ 논란이 따를 인용으로 비주류 해석을 널리 퍼지게 했느냐는 점이다. 재판부는 자초지종을 설명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승현 논설위원
물론 항소심이 더 공을 들여 설명할 것은 판결 자체에 대해서다. 1심은 ‘대선 정국을 맞아 원(국정원)이 휩쓸리지 않도록 더욱 철저히 관리하라’며 선거 개입 금지를 지시했다는 원 전 원장 주장을 수용했지만, 항소심은 “외부에 드러나 문제되는 일이 없도록 더욱 조심하라는 것에 방점을 둔 말”이라고 해석했다.

이런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1, 2심의 유무죄 판단도 이런 해석 차이에서 갈렸다. 자유심증주의는 법관을 불신하는 법정증거주의와 달리 법관을 신뢰하고 법관 판단을 믿는 진일보한 개념이다. 하지만 같은 증거자료·증언을 놓고도 유무죄 판결로 나뉘기 일쑤니 코미디에 가깝다. 자유심증주의 보완론이 제기될 수도 있다. 주류 해석은 뭔지, 그런 게 있기는 한지 등의 물음표도 찍힌다. 사법 불신이 확산될까 봐 걱정이다. 우려를 덜려면 일차적으로 친절한 설명이 필요하다. 원 전 원장이 어제 결국 변호사를 통해 상고장을 제출했으니 대법원의 현명한 판단도 있어야 할 테고….

위정편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어록도 많다. 공자가 제자 자로에게 해주는 ‘지지위지지 부지위부지 시지야(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같은 조언이 대표적이다. ‘아는 것을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 하는 것, 이것이 아는 것이다’는 뜻이다. 하지만 현직 법관들에게 도움될 리는 만무하다. 설혹 알지 못해도 판결은 내려야 하고 때론 인용도 해야 할 테니까. 법관 팔자, 참 힘든 팔자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이승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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