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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 속에 억압된 것을 찾아내 표현하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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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02-23 19:48:42 수정 : 2015-02-25 15:5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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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완식이 만난 사람] ‘전생퇴행’ 그림전 여는 이수경 작가 나는 붉은 장미가 만발한 숲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향긋한 꽃 향기가 점점 진해져서 어지러울 지경입니다. 나의 피부는 어두운 갈색이고 덩치는 큰 편입니다. 나는 모계 부족의 여 족장이며 샤먼입니다. 오늘은 얼굴에 특별한 화장과 장식을 했습니다. 그리고 온갖 구슬과 조가비를 엮은 커다란 장신구를 걸쳤습니다. 나는 50명쯤 되는 내 부족민들과 바닷가에 모여 있습니다. 검푸른 빛깔의 바다는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며 무섭게 일렁입니다. 바다 밑에는 수명이 다한 고래 한 마리가 고요히 누워 있습니다. 우리 부족은 조상 대대로 고래를 숭배해 왔습니다. 지금은 죽은 고래의 영혼을 달래는 의식을 치르고 있습니다. 나는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서서 아주 높은 소리로 주문을 외웁니다. 아르르르르르! 곧 죽은 고래의 영혼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나는 그 영혼과의 깊은 대화를 나눕니다. 거대한 보름달이 바다를 뒤덮을 만큼 가까이 다가옵니다. 수정같이 투명한 달빛이 바다를 비추고, 죽은 고래를 비춥니다. 숨져 있던 고래는 빛을 받은 후에 서서히 헤엄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번쩍 뛰어올라 달에 도달합니다. 크고 눈부신 달 아래 바다는 숭고하게 일렁입니다.

이수경(52)작가의 ‘전생퇴행’ 이야기다. 그는 지난해 1월부터 매달 한 번씩 심리상담사에게 최면을 통한 ‘전생 퇴행’ 경험을 해 오고 있다. 3∼4시간 정도 최면에 빠져 있지만 의식은 또렷하고 떠오르는 이미지들도 아주 선명하다. 그는 전 과정을 녹음하고 이미지는 캔버스에 옮겨 작품을 만들었다.

‘전생퇴행’은 전생의 기억들을 이용하여 현재의 문제들을 치료하는 전생요법이다. 프로이트의 이론인 ‘현재의 행동은 과거의 경험에 의해 형성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불교의 업(karma)을 연상시킨다. 사람들이 과거의 업 때문에 현재의 질병, 인간관계 문제와 각종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전생치료의 논리 속에는 환생이나 윤회의 개념이 필수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영혼은 육체적인 삶이나 죽음과 관계없이 늘 우주에 존재하면서 육체의 옷을 입고 이 땅에서의 삶을 계속하기 위하여 환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불교적 윤회다. 1980년대 들어 서구에서 전생퇴행이 인간영혼의 순례와 생명의 의미 쪽으로 관심의 방향이 옮겨지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이수경 작가가 깨진 도자 파편을 퍼즐 맞추듯이 이어 만든 작품 옆에 서 있다. 그는 “치유야말로 생명에게 주어진 ‘아름다운 진화’라고 말해 주고 싶다”고 했다.
“의식 자체가 긍극적인 존재라는 점에 공감하고 있다. 인체는 하나의 ‘에너지 장(場)’으로, 치유란 에너지 장에 변화를 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가 또 다른 전생퇴행 이야기를 이어갔다. 시대적 배경은 조선시대다. 포졸들이 그를 절벽으로 끌고가 바다에 내던졌다. 죽음은 그리 고통스럽지 않았다. 숨이 멎었지만 그는 용 장식의 옥비녀를 손에 꼭 쥐고 있었다. 풍랑이 이는 바닷속에서 그는 곧 물거품으로 변했다. 물거품이 된 그는 거대한 용은 물론 작은 물고기떼, 산호, 또는 꽃과 같은 모양도 만들어 냈다. 무궁무진한 자유자재로움에 재미가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커다란 해일이 되고 말았다. 마을 전체를 완전히 쓸어버렸다. 해일로 변모한 그는 죄의식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심지어 그는 ‘이제 전부 깨끗해졌네, 나는 지구를 위해서 당연한 일을 한 거야’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영은 산꼭대기 가장 큰 전나무에 스며들었다. 그는 뿌리를 통해 바다의 생명체들과도 교신을 했다. 곧 화산이 폭발하고 생명을 잃은 그는 아름다운 빛 줄기를 따라서 하늘로 올라갔다. 해파리처럼 생긴 반투명의 물체를 타고 있었다. 그러나 죽은 것들의 대부분은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고 빗물로 변해서 땅에 떨어져 버렸다. 다행히 그는 무사히 하늘로 올라 빛 속으로 들어갔다. 파노라마 같은 장면이다.

“나는 고요하고 광활한 우주 공간을 떠다니기도 했다. 저 멀리에 신처럼 보이는 존재들이 행성을 하나씩 들고 있었고 그중에는 지구도 있었다. 빛으로 이루어진 그들은 고요히 자신의 행성을 품에 안아 돌보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서 나는 엄청난 굉음과 광채가 뒤엉킨 터널로 쑥 빨려 들어갔다. 나는 일순간 다른 차원을 통과했다. 나는 태어나고 있는 중이었다. 훈훈한 바람에 실려오는 흙 냄새가 마음을 포근하게 해줬다. 아프리카의 어느 작은 마을에서 내가 흑인 사내아이로 세상에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중견 작가인 그가 왜 갑자기 ‘전생퇴행그림’을 들고 나왔을까. 버려진 도자 파편들을 하나하나 퍼즐 조각 맞추듯이 이어 붙여, 다양한 형태를 만들어 나가는 작업으로 이미 국제미술계에 이름을 알린 작가라는 점에서 의아할 수밖에 없다.

심청이를 만난 장면을 그린 ‘전생퇴행 그림’. 여자애들이 한줄로 물위에 떠 있었는데 심청이가 작가에게 자신은 하나가 아니고 12명이라고 했단다.
“무의식속에 억압된 것들을 찾아서 그림으로 표현해 보고 싶었다. 우리의 몸에는 50억년 전 초신성 폭발 때 만들어진 우주의 먼지가 담겨 있다. 동아시아적 사고의 중요한 모티브 중 하나인 윤회 및 전생을 생각해 보았다. 지구상의 모든 생물이 우주의 먼지를 담고 있고 또 공유하고 있다면, 윤회란 어느 한 존재의 생사가 반복되면서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선형적인 것이 아닌, 모든 존재들이 뒤섞여 그물망처럼 연결된 다중적인 것일 거다. 전생퇴행 때 보게 되는 수많은 이미지와 내러티브들은 의식의 통제에서 벗어난 무의식이 얼마나 창의적인지 알게 해준다.”

실패작으로 깨어진 도자 파편들을 모아 재탄생시키는 그의 작업도 사실상 부활이자 윤회다. 보다 성숙해 가는 아름다운 삶에 대한 메타포다. 불교적으로 말해 업이 소멸되어 가면서 해탈의 경지에 이르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전생퇴행 그림에 대해 의아해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자신의 지식체계와 크게 어긋나는 사실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더 이상 발전은 없다. 갈릴레오나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반문해 보아야 한다.”

그는 전생퇴행 경험을 통해 인생의 관점이 바뀌었다. 죽음마저도 이젠 두렵지 않다. 상처투성이의 마음도 치유가 됐다. 적어도 그에겐 실용성이 입중된 셈이다. 전생치료법이 의학계에서 여전히 논란이 일고 있는 것과는 별개다. 무엇보다도 작가로서의 상상력을 확장한 것이 큰 소득이다. 전생퇴행 그림은 5월17일까지 대구미술관에서 열리는 ‘이수경’전에서 볼 수 있다. 전시는 오는 6월부터 대만 타이베이 현대미술관으로 이어진다.

편완식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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